그림이라는 '즐거운 노동'…작품값은 세상의 몫이죠 [작가의 아틀리에]

■'도도새 작가' 김선우 평창동 작업실
스스로 도태된 도도새, 모리셔스서 멸종
그림 통해 현실 안주하는 인간에 메시지
MZ 취향 저격…'가장 사랑하는 작가'로
경매서 추정가 4배에 낙찰, 몸값 치솟아
바닷가 '춤추는 도도새'로 새 희망 전할 것

김선우 작가의 작업 모습. 사진 제공=프린트베이커리


“그림을 통해서 얻는 것은 성취감이죠. 반복해서 그림을 그리고, ‘나 자신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완성해나간다’는 쾌감을 느낍니다. 그런 쾌감 덕분에 이 노동을 기꺼이 이어갈 수 있죠.”


그림 그리는 일을 ‘노동’이라 말하는 작가의 표정은 평온했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노동’을 언젠가는 그만둬야 할 지긋지긋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안정적이고 차분한 목소리로 “나는 노동이 즐겁다”고 말하는 그는 2024년 현재 ‘대한민국 MZ 컬렉터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 김선우다. ‘도도새 작가’ ‘스타 작가’ ‘완판 작가’ 등 작가라면 탐낼 만한 수많은 수식어를 갖고 있는 김선우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계획형 인간’이 만든 환상적인 도도새의 세계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스스로를 “철저한 계획형·관리형 인간”이라고 했다. 그의 스케줄을 들어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는 이곳 작업실에 매일 오전 5시 30분까지 출근한다. 집에서 작업실까지 걸리는 시간은 15분, 교통수단은 자전거다. 출근 후에는 달걀이나 견과류를 먹고 커피를 내려 마신다. 점심 때는 샐러드를 먹는 등 배부르게 먹는 것을 피하는 편이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력과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데 식사가 부실해 보인다. 우려하는 기자에게 그는 “그림을 그리는 일은 제가 인생에서 가장 잘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에 하루 중 가장 먼저, 가장 좋은 컨디션에서 해내고 싶다”고 말했다.



김선우의 작업실 ‘스튜디오 도도’ 내부 모습. 사진=서지혜 기자



작업이 한창인 ‘스튜디오 도도’의 모습. 사진=서지혜 기자


작업실에는 그의 상징과도 같은 도도새 그림이 가득했다. 도도새는 인도양의 섬 모리셔스에 살던 부리가 큰 새로 1681년 멸종했다. 모리셔스에는 도도새의 천적이라 할 만한 포유류가 없었기 때문에 도도새들은 날 필요가 없었고, 인간들이 도도새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날개가 퇴화해 비행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우리는 흔히 도도새를 ‘스스로 도태된 게으른 새’라고 알고 있다.


김선우의 그림 속 도도새들은 여전히 날 수 없지만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꿈을 꾼다. 종종 하늘을 향해 여러 개의 풍선을 들어 올려보기도 하고 연못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들은 춤을 추고, 이야기를 나누며, 풀내음을 맡는다. 그가 그린 도도새들을 보며 작업실을 거닐어 보니 마치 도도새 나라에 초대를 받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작업실에서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는 작가 김선우의 모습. 사진=서지혜 기자

작업실에서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는 작가 김선우의 모습. 사진=서지혜 기자


미술계 ‘귀하신 몸’ 도도새, 철저한 연구와 조사의 산물

도도새는 엄청난 기획과 철저한 연구의 결과물이다. 그는 미술학도였던 대학생 시절부터 ‘새’를 탐구했다. 졸업 후 별다른 꿈 없이 일제히 같은 진로를 찾아가는 친구들을 보며 ‘날개를 잃어버린 새’를 떠올린 것. 그는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대학생들이 세상의 형식에 자신을 맞춰가는 것이 안타까웠다”며 “구조적인 문제 제기를 하기 위해 ‘새의 머리를 한 인간’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선우 작가. 사진 제공=프린트베이커리


캔버스 속 그림이 ‘새 머리 인간’에서 ‘도도새’로 바뀐 계기는 지금은 없어진 일현미술관의 공모전이다. 당시 이 미술관은 아마추어 작가들에게 작품 활동을 위한 여행비를 지원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여행이 작가의 작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게 프로젝트의 조건. 인터넷을 뒤지며 소재를 찾던 어느 날 작가는 우연히 도도새 이야기를 발견했고 ‘유레카’를 외쳤다. ‘멸종해버린 도도새를 찾으러 모리셔스에 간다’는 기획 아이디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김선우는 “대부분 공모전은 석박사 이상까지 지원이 가능했기 때문에 학사만 졸업한 나에게는 무척 불리했다”며 “결국 아이디어로 승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없는 새를 찾으러 간다’는 아이디어는 아무도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도도새 여행 계획’ 후원으로 이어졌고 일반적으로 신혼여행지로 여겨지는 ‘탄생의 섬’ 모리셔스에 가게 된 것. 그는 그곳에서 우연히 마주친 모든 여행객들에게 ‘도도새를 본 적 있느냐’고 묻는 미션을 수행했다. 그리고 여행객들의 대답과 현지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된 도도새의 흔적을 통해 거침없이 드로잉을 시작한다. 그는 “탄생의 섬인 모리셔스는 사실 도도새의 무덤”이라며 “도도새가 스스로 날기를 포기해서 멸종한 것처럼 이 환경에 안주하고 자신만의 특별한 무언가를 찾지 않으면 인간도 언젠가 그렇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그림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억’ 소리 나는 작품 가격은 세상의 몫, 작가의 몫은 성실한 창작


김선우의 ‘모리셔스 섬의 일요일 오후’.


작가 김선우와 도도새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가 바로 가격이다. 도도새는 지금 미술 시장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캐릭터 중 하나다. 국내 미술 시장의 극호황기라 할 수 있는 2021년 9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그의 작품 ‘모리셔스 섬의 일요일 오후’가 추정가(3000만 원)의 4배에 이르는 1억 1500만 원에 낙찰돼 큰 화제를 모았고, 지난해 열린 화랑 미술제에서는 파리의 유서 깊은 석판화 공방에서 특별 제작한 200만 원 상당의 에디션 판화 50점이 모두 10분 만에 새 주인을 만났다. 미술 시장이 좀처럼 회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침체기인데도 올해 6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그의 작품은 추정가보다 4배나 비싼 가격에 팔렸다.



26일 강릉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김선우의 개인전에 전시될 신작 '나와 함께 춤을'.

많은 MZ 컬렉터들이 꿈에서나 볼 법한 그의 환상적인 그림에 기꺼이 지갑을 열고 있다. 사실 경매 시장에서 책정되는 가격은 작가의 수익과 무관하다. 그런데도 1988년생 젊은 작가의 이 같은 성공에 세상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누군가가 경매 가격을 띄우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인터뷰 내내 습관처럼 ‘성실’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던 작가에게는 이 같은 분위기가 억울할지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이 부분에 있어 의외로 담대했다.


그는 “그림이 비싼 값에 많이 팔리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그건 세상의 몫이고 저는 창작 활동이라는 제 몫을 할 뿐”이라며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에 출품하는 과정까지가 나의 일”이라고 했다. 이처럼 ‘과정’에 몰입하다 보니 전시장에 작품을 모두 보내고 나면 ‘번아웃’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는 “전시를 시작한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 그림 그리기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그러면 내 공이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갔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생애 첫 공공 미술관 개인전…“춤추고 날아오르는 자유로운 도도새 그릴 것”


김선우의 ‘릴리, 플라워, 댄스, 도도’.


최근 김선우에게는 ‘작품값’ 이상의 가치 있는 기회가 연이어 찾아오고 있다. 우선 26일 강원도 강릉시립미술관에서 ‘춤, 흐르는 물결, 일렁이는 마음, 꿈꾸는 표류’라는 제목의 기획 전시를 열었다. 전시는 10월 6일까지다. 작가로서는 처음 도전한 공공 미술관 개인전이다. 전시의 주제는 ‘춤’이다. 그는 “전시의 기획은 전시 일정이 잡힌 후 공간을 보면서 직접 정하는데 이번 전시는 강릉이라는 도시가 춤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그리스 크레타섬에서 한 달간 머물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일렁이는 파도를 보면서 도도새가 저기서 춤을 추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며 “마친 전시장이 해변가가 보이는 곳이어서 ‘춤’이라는 기획을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최근 스타벅스와 진행한 협업 프로젝트에서는 도도새가 그려진 ‘토트백’이 온라인 판매를 시작하자마자 완판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덕분에 미술계뿐 아니라 유통 업계에서도 도도새의 몸값은 치솟는 중이다. 하지만 김선우는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그는 “전시가 끝나면 티베트·히말라야 등 다양한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며 “익숙한 곳에서 벗어나 시간을 환기하는 것이 여행인데 그런 게 왜 일상에서 잘 되지 않는지 질문하는 게 제 직업의 핵심이자 예술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김선우의 그림 속 도도새들은 대개 알록달록한 풍선을 쥐고 있다. 그는 “도도새에게 새로운 삶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하늘을 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며 “자신의 날개로는 날지 못하지만 풍선이나 다른 도구를 통해 탐험하거나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그리고 싶었고, 도도새들이 그러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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