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 ‘시대의 전설’ 김민기가 갔다.
운동권도 아니면서 투쟁의 선봉에 섰던 그의 노래들... 그중 김민기가 1971년에 발표한 곡 ‘아침이슬’은 가히 선동적 혁명적 낭만주의의 진수다. 특히 양희은 버전은 그녀의 초창기 맑은 목소리와 시원한 창법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그 시절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러나 ‘아침이슬’을 김민기 버전으로 들어보면 사뭇 느낌이 다르다. 김민기 특유의 조용한 독백은 그저 나약한 지식인의 넋두리, 읊조림 쯤으로 들린다. 같은 노랫말인데도 부르는 가수에 따라 참으로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러고 보면 노래의 해석은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대중의 손에 달려있다. 노래가 가수를 떠나면 부르는 이들의 노래가 되는 것, 언어 마냥 노래에도 사회성이 있다.
언젠가 음악평론가 강헌의 강연에서 아침이슬 작사 비화를 듣곤 배꼽을 잡았더랬다. 강헌 왈, 아침이슬이 시위와 투쟁 현장에서 소리높여 불릴 때 김민기는 필시 부끄러웠을 거라고! 김민기가 아르바이트로 하루하루 연명하던 시절, 어느 날 술을 진탕 먹고 필름이 끊겨 아침에 깨어나 보니 공동묘지였단다. 아무튼 그때의 서글프고 허망한 심정을 한탄 조로 읊은 게 바로 아침이슬이라고. 가만히 가사를 곱씹어 보면 웃음이 나온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사연을 알고 보면 결코 독재에 항거하는 민중의 시퍼런 결단이 아니라, 다시 고단한 일터로 복귀해야 하는 서러운 생활인의 비애가 오롯이 녹아있는 듯도 하니 이것도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렸다. 아무튼 노래는 오롯이 청중의 것이 되어 시대의 역사 노래로 남았다. 시위와 투쟁의 현장에서 단골로 불리는 이 노래가 금지곡이 된 건 그 시기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북한에서도 한동안 회자되다가 그 반체제 혁명성 때문에 금지곡이 됐다는 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김민기는 아무 죄가 없다. 아침이슬이 선봉에 서서 혁명가의 노래가 된 건 결코 그의 의도가 아니다. 다만 그가 만든 노래는 더 이상 그만의 노래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갖고 살아남았을 뿐이다. 김민기 노래는 노랫말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심지어 아름다운 노랫말 상까지 받은 아침이슬은 그 당시 유일하게 ‘사유가 없는 금지곡’이었다고. 실제 당시 금지됐던 몇몇 곡들의 금지 사유를 들어보면 웃음만 나온다. 양희은이 부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왜 이루어질 수 없느냐”며 가사가 퇴폐하다는 이유로 금지시켰다고 한다. 김세환의 ‘길가에 앉아서’는 “할 일 없이 한가하게 지나가는 사람이나 쳐다보고 있다”며 ‘근로 의욕 저하’를 문제 삼았다고 한다.
시위 곡으로 2등이라면 서러울 ‘늙은 군인의 노래’도 실은 나직한 기타 선율에 조용하게 읊조리는 독백 같은 김민기 노래 버전이 제일이다. 이 곡은 느릿느릿 부르면 장엄한 곡조가 먼저 간 이들의 추모곡으로도 맞춤이다. 엄혹한 시절을 견디며 투쟁했던 곡이지만 이 노래도 그 시작은 역시 김민기의 다른 곡들처럼 낭만과 순수의 발로였다. 김민기의 군 복무 시절, 30년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을 앞둔 어떤 선임하사의 부탁으로 작곡했다고 한다.
김민기는 원래 카투사로 입대했는데, 그가 강제징집 직전 작곡한 곡이 아침이슬이다. 이 곡이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유신 독재 반대 집회 때 대거 불리면서 그는 다시 보안대로 끌려가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 전방으로 재배치된다. ‘인제 가면 언제 오리, 원통해서 못 살겠네!’라는 농처럼 한번 가면 돌아오기 힘들다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거기서 만난 퇴역을 앞둔 늙은 선임 상사가, 1976년 겨울 어느 날 김민기에게 막걸리 두 말을 내놓으며 자신의 30년 직업 군인 인생을 노래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고.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가 ‘늙은 군인의 노래’다. 그렇게 알고 가사를 들어보면 오랫동안 복무한 직업 군인의 애환과 설움, 소박한 나라 사랑의 마음을 노래하는 곡이다.
제대 후 김민기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요주의 반정부 투사로 유명해져 더 이상 노래를 발표할 수 없었기에 늙은 군인의 노래는 할 수 없이 1978년 양희은의 음반으로 나왔다. 이 노래가 군인들 사이에 퍼지며 널리 애창되자 약하고 패배주의적인 가사로 인해 군기가 해이해진다며 국방부 장관 지정 금지곡 1호가 됐던 것. 그도 그럴 것이 노랫말은 국방부가 기대하는 당당한 군인의 위상과는 거리가 먼, 가진 것 없이 쓸쓸한 늙은 군인의 신세타령쯤으로 들렸을 것이다. 게다가 가사 ‘좋은 옷 입고프냐 맛난 것 먹고프냐? 아서라 말아라, 군인 아들 너로다’에서 심사가 틀어졌을 이들도 적지 않았으리라. 아무튼 군인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금지된 후 이 노래는 질곡의 세상을 만나 또 그렇게 진화했다.
김민기는 결코 투사가 아니다. 시위한 적도, 데모하다 투옥된 적도 없기에 그 자신도 그렇게 불리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시퍼런 유신 시절부터 지난 촛불시위 때까지 언제나 한결같이 '투사'와 함께 했다. 시대를 잘 만났으면 그저 감수성 짙은 노랫말을 아름다운 곡으로 읊조리는 음유시인으로 살거나 뮤지컬 역사를 새로 쓴 한국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성공에서 보듯이 탁월한 공연 기획자로 대학로 연극판을 빛냈을 그이기에 아깝고 안타깝다. 청춘 시절 ‘학전’을 사랑하고 청춘을 보냈던 1인으로서 그의 무대가 새삼 그리워진다.
시대는 사람도 음악도 달리 쓰는 법이다. 대학가 노래패의 단골 곡으로, 시위 현장의 투쟁 곡으로, 깡술판의 단골 안주 곡으로 사랑받았던 김민기의 노래들. 시인 김남주는 투쟁심을 저하하는 패배주의적인 노래라고 공격하기도 했다지만 누가 뭐래도 그의 곡 상록수와 아침이슬과 친구, 공장의 불빛들은 묵직한 울림으로 시대를 울리며 낮은 데로 임해 서글픈 이들을 위로했다.
투사도 혁명가도 아니면서 노래로, 노동으로, 농사로, 야학으로 생활 속에서 민주주의와 시민의식을 묵묵히 실천했던 김민기를 보내며 그가 아끼고 사랑했던 노동자와 농부와 연극판 딴따라와 어린이들까지 모두가 행복한 꿈을 함께 꾸는 세상이기를 바라 본다. 누군가의 노래는 그렇게 또 누군가의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