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가상자산사업자(VASP) 라이선스 취득을 포기하고 해외로 떠나는 블록체인 프로젝트·기업이 늘고 있다. VASP 발급 요건도 까다롭고 취득 이후 상당한 비용이 수반돼 스타트업 입장에서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 상 VASP가 영위할 수 있는 사업이 제한적이라는 점도 문제다. 이 때문에 결국 해외로 떠나는 기업들도 점점 눈에 띄고 있다. 이들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선 규제 샌드박스·특구 확대, 법인 투자 허용 등 유인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31일 한 업계 관계자는 “주변에 VASP를 받지 않겠다는 사업자가 많다”며 “VASP 발급도 어렵지만 취득 이후 규제 대응에 어마어마한 비용이 든다”고 밝혔다. 한국에서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운영 중인 A대표는 “VASP 취득 이후 지출되는 비용은 스타트업이 감당하기 무리”라며 “지금도 여러 프로젝트가 등장하고 있지만 한국 사업을 꺼리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가상자산 사업을 하려면 특금법에 따라 △정보보호 관리체계(ISMS) 인증 △은행의 실명확인 입출금계정 발급 △대표·임원의 자격 요건을 충족한 뒤 금융당국에 신고해야 한다. 다만 업계에선 그동안 은행의 실명계좌 발급 기준이 높아 VASP 취득이 어렵다는 불만이 제기됐다. 금융당국이 지금까지 신고수리한 VASP는 총 37곳이지만 지난해 신고수리를 받은 업체는 단 한 곳(인피닛블록)에 불과했다. 여기에 금융위원회가 지난달 은행의 실명계좌 발급 기준을 강화한 ‘특금법 시행령·고시 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면서 VASP 진입 장벽은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A대표는 “VASP 취득이 어려워 해외에 법인을 설립하는 방안도 고민 중"이라고 토로했다. VASP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세탁방지(AML) 비용도 인건비를 포함해 수억 원이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블록체인 프로젝트·기업들이 홍콩과 싱가포르, 두바이 등 규제가 상대적으로 느슨한 국가로 떠나는 배경이다.
VASP에 허용된 사업이 제한적이라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특금법은 가상자산 거래소와 지갑, 커스터디(수탁) 서비스만 VASP로 규정했다. 백훈종 샌드뱅크 이사는 “VASP가 할 수 있는 사업이 매우 적어 차라리 안 받는 게 낫다는 의견도 있다”며 “규정된 범위 외의 사업을 하면 당국이 제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 거래소 관계자는 “한국의 블록체인 서비스가 다양하지 않은 건 규제의 산물”이라며 “질 좋은 서비스를 도입해 기술·인프라가 발전해야 하는데 한국은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한국이 신사업 모델을 발굴하기 힘든 환경이란 설명이다. 가상자산 발행(ICO) 사업도 시세조종, 사기에 대한 우려로 지난 2017년 이후 그림자 규제에 의해 금지된 바 있다.
업계는 법 개정이 어렵다면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VASP의 사업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입장이다. A대표는 “규제 샌드박스가 많아지면 시장 참여자도 다양해질 것”이라고 전했다. 다만 백 이사는 “부산, 인천 등 블록체인 규제 특구를 받은 지자체가 많지만 (서울에서) 멀어 인력을 구하기 어렵다”며 “서울 근교에 특구를 유치해야 적극적으로 사업에 도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인력·자본이 적은 블록체인 스타트업 대부분이 서울 강남구에 위치해 서울과 먼 곳에서 사업을 시작하면 부담이 크다는 지적이다.
한국에서 금지된 법인 투자를 허용하면 다양한 신사업에 도전할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백 이사는 “법인 투자를 허용하면 기관투자가를 최대 고객으로 둔 커스터디 시장도 탄력을 받을 것”이라며 “장외거래(OTC) 플랫폼이나 법인 전용 거래소가 등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법인이 장내 시장에서 어려운 대규모 거래를 OTC 시장에서 처리하면 가상자산의 가격 변동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정구태 인피닛블록 대표도 지난 2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서울에서 열린 ‘디지털 금융 혁신 포럼’에서 “한국형 비트코인(BTC) 현물 ETF가 논의되고 있지만 출시되기에는 가상자산 사업자가 현저히 부족하다"며 “커스터디를 포함해 지수 관리 업체, 시장 조성자(MM), OTC 업체 등 다양한 사업자가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병환 금융위원장 후보자는 지난 22일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법인·기관의 가상자산 계좌 허용에 대해선 신중한 입장”이라며 선을 그었다.
일본처럼 리쇼어링(해외로 빠져나간 기업을 다시 국내로 불러들이는 것) 정책도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한국 블록체인 기업의 이탈을 막아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취지다. 일본은 지난 2014년 가상자산 거래소 마운트곡스 해킹 이후 강화된 규제로 해외에 진출한 기업을 다시 들이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일본 의회와 정부는 직속 블록체인 전담 기구를 만들고 지난해 가상자산 미실현 이익에 법인세(30%)를 징수하는 법안을 폐지했다. 거래소 관계자는 “지난 1분기 원화를 이용한 가상자산 거래량이 미국 달러보다 높을 정도로 한국의 위상이 커졌지만 인프라는 뒤처지고 있다”며 “해외로 떠난 기업과 외국 자본·기술을 받아들여 시장 발전을 꾀해야 한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