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컴퓨터가 일반 카메라라면, 양자컴퓨터는 드론에 붙인 카메라입니다. 일반 카메라로도 사진을 찍을 수는 있지만 철탑 위에서 내려다 본 경관을 촬영하는 등 한계를 극복해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내는 방식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표창희 IBM 양자컴퓨팅 사업본부장·상무)
반도체 공정 미세화의 한계로 컴퓨터의 발전 속도가 더뎌지면서 완전히 혁신적인 방식의 ‘연산 기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로서 전 세계 정보기술(IT) 업계가 주목하고 있는 기술이 양자컴퓨터다. 기존 슈퍼컴퓨터로도 수행하기 어려웠던 초고속 연산을 가능케 해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핵심 키’로 기대를 모은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마케츠앤마케츠에 따르면 지난해 9억 달러(약 1조 2400억 원)였던 글로벌 양자컴퓨터 시장 규모는 올해 13억 달러(약 1조 8000억 원)로 추정된다. 이 시장은 이후 2029년까지 연평균 32.7% 성장하면서 53억 달러(약 7조 3200억 원)까지 성장할 전망이다. 우리 정부도 양자 분야 글로벌 주도권 확보를 위해 양자컴퓨터를 비롯한 9개 핵심 양자 분야에 집중 투자하는 ‘퀀텀이니셔티브’를 추진 중이다. 양자컴퓨터 분야에서 가장 앞서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IBM은 선단 기술력 확보를 넘어서 전 세계 주요 기업·연구기관이 참여하는 ‘퀀텀 생태계’ 구축을 시도 중이다. 업계에서는 자체 기술력 확보와 더불어 글로벌 선도 생태계에 빠르게 참여해 최첨단 기술 흐름에 올라타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IBM의 양자컴퓨팅 사업을 이끌고 있는 표 상무를 통해 최첨단 양자컴퓨팅 기술의 현황을 살펴봤다.
◇슈퍼컴퓨터 한계 넘는 ‘양자컴’ 원리는=양자컴퓨터는 양자역학의 원리를 이용해 작동하는 컴퓨터다. ‘0과 1’의 2진법으로 작동하는 기존 컴퓨터와 달리 0과 1의 상태에 동시에 있을 수 있는 ‘중첩(superposition)’ 상태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다. 중첩 상태가 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해 00, 01, 10, 11 등으로 동시 활용이 가능할 수 있다. 이 기본 정보 단위가 ‘큐비트(qubit)’다. 여기에 ‘얽힘(entanglement)’라는 특성까지 더하면 양자컴퓨터로 현대 컴퓨터가 수행할 수 없는 복잡한 계산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다.
기존 컴퓨터가 계산을 순차적으로 처리(직렬 연산)하는 데 비해 양자컴퓨터는 얽힘 상태를 이용해 병렬 연산을 할 수 있다. 100개의 문 중 외부로 나갈 수 있는 하나의 문을 찾는다고 가정하면, 기존 컴퓨터는 첫 번째 문부터 100개를 순차적으로 확인해 정답을 찾는다. 반면 양자컴퓨터는 100개의 문을 한꺼번에 확인해 그중 외부로 나가는 문을 찾아내는 식이다. 천문학적인 선택지가 존재하는 분자 시뮬레이션, 복잡한 최적화 문제, 암호 해독 등 기존 컴퓨터가 수십~수백 년 걸려 풀 문제를 훨씬 빠르고 효과적으로 풀 수 있다. 일례로 지난해 IBM 연구진이 실시한 연산 실험에서 슈퍼컴퓨터는 답을 내지도 못한 복잡한 계산 문제에 대해 양자컴퓨터는 1000분의 1초 만에 정확한 답을 내놨다.
이 같은 특성으로 인해 양자컴퓨터는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답을 찾아내야 하는 분야에서 월등한 능력을 갖는다. 분자 시뮬레이션이 필요한 화학 분야와 의료, 금융, 인공지능(AI) 등에서 특히 유용할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 달리 양자컴퓨터가 모든 면에서 기존 컴퓨터를 뛰어넘는 것은 아니다. 병렬 연산을 기반으로 최적화 문제 등 특정 분야의 연산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한 성능을 보일 뿐이다. 표 상무는 “기존 컴퓨터와 양자컴퓨터가 갖는 장단점이 확실히 다르다”며 “양자컴퓨터는 기존 컴퓨터가 연산하기에 규모가 너무 크거나 너무 오래 걸리는, 다루기 힘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 컴퓨터의 한계를 보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IBM, ‘양자우위’ 내년 돌파한다=전문가들의 해석이 각자 다르긴 하지만 IBM은 양자컴퓨터가 기존 컴퓨터의 연산 능력을 뛰어넘는 ‘양자 우위(Quantum Advantage)’의 기준으로 1000큐비트를 예상한다. 큐비트의 연산 능력이 ‘2의 n승’으로 개선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1000큐비트는 정부가 2030년까지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는 100큐비트 대비 무려 ‘2의 900승’배의 능력을 갖는다.
극도로 예민한 양자를 정확하게 제어하기 위해 IBM은 양자컴퓨터에 절대온도(영하 273도)에서 전류 저항이 없는 초전도체로 큐비트를 만든다. 이온트랩, 중성원자 등 양자컴퓨터를 만드는 다른 방식들도 연구되고 있지만 현재 가장 실용화에 가까운 방식이다. 액화질소, 헬륨 등을 사용해 프로세서를 초저온 상태로 만든다. 이 때문에 IBM의 양자컴퓨터 외피를 벗겨보면 마치 샹들리에처럼 화려한 내부 구조가 나타난다.
IBM은 지난해 1121큐비트로 구성된 양자 프로세서 ‘콘도르’를 공개했다. 기술적으로는 양자 우위에 이미 거의 근처까지 다가간 셈이다. 다만 오류를 최소화해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실제 양자컴퓨터 시스템으로는 133큐비트의 ‘헤론’ 프로세서 3개를 연결해 산술적으로 399큐비트 성능을 갖춘 ‘퀀텀 시스템 투(Ⅱ)’가 현존 최대 성능이다. 이에 앞서 출시된 ‘퀀텀 시스템 원(Ⅰ)’은 현재까지 출시된 양자컴퓨터 중 가장 안정적인 성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예민한 양자 상태로 인한 오류율이 양자컴퓨터의 실용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큐비트 집약도 향상보다 안정성 확보가 우선이다. 때문에 IBM은 당분간 프로세서 하나의 집적도를 높이기보다 안정성이 확보된 헤론의 연결 숫자를 늘리는 방식으로 성능 확보를 이뤄나간다는 전략이다. 내년에는 156큐비트로 성능이 개선된 헤론 프로세서 7개를 연결해 1092큐비트의 양자컴퓨터를 만들 계획이다.
◇상용화 임박…양자 생태계도 활성화=현재 양자컴퓨터는 실용화에 거의 임박한 단계다. 표 상무는 “공식적인 목표는 아니지만 빠르면 3년, 길어도 5년 안에는 (상용화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그는 “양자컴퓨팅에 대해 지금 준비를 시작한 기업은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향후 80~90% 수준의 이익이 있을 것으로 본다”며 “지금 준비하지 않고 있는 기업은 나중에 양자컴퓨팅 관련 인재 확보과 경험 등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IBM에 따르면 아직 상용화 전이지만 양자컴퓨터를 사용하는 인구는 매년 50%씩 증가하고 있다. 관련 누적 투자액은 전 세계적으로 350억 달러(약 48조 3700억 원)에 달한다. 실제로 독일의 메르세데스 벤츠가 IBM과 협력해 전기차 배터리의 화학 작용을 시뮬레이션 하는 데 양자컴퓨터를 활용하고 있고 글로벌 화학회사인 엑슨모빌과 미쓰비시 화학, 항공기 제조사 보잉 등도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IBM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결합한 양자컴퓨터의 생태계 조성에 힘을 쏟고 있다. 포춘 500대 기업과 글로벌 스타트업, 연구기관 등에 속한 약 290개의 기업·기관이 현재 ‘IBM 양자 네트워크’에 속해 양자컴퓨터 관련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삼성전자를 비롯해 LG전자, 두산, 서울대, 연세대, 성균관대 등이 연구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이중 연세대는 올해 하반기에 127큐비트의 ‘IBM 시스템 원’을 올해 실제 도입해 정밀의학 분야의 연구·개발(R&D)에 활용할 예정이다.
생태계 확장을 위해 IBM은 자사 양자컴퓨터에 최적화한 양자컴퓨팅 소프트웨어(SW) 개발 도구인 ‘퀴스킷(Qiskit)’을 완전한 오픈소스로 제공 중이다. 현재 양자컴퓨터 이용자의 약 80%가 퀴스킷을 기반으로 이용하고 있다. IBM은 퀴스킷을 통해 수익화를 이루기보다 자사 양자컴퓨터에 최적화된 플랫폼의 확산을 통해 시장 지배력을 갖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개발 플랫폼 ‘쿠다’를 통해 GPU 생태계를 장악한 엔비디아와 같은 전략이다. 표 상무는 “퀴스킷에 거대언어모델(LLM) 모델까지 포함해 더욱 개발을 용이하게 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버전업’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