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고운 색이라니. 영롱하게 일렁이는 저 색을 어디서 봤던가. 도심 빌딩 사이로 눈에 띈 노을, 산 위에서 내려다 본 굽이치는 숲, 하염없이 바라봤던 바다와 파도…. 어렴풋한 느낌으로 감지되는 그 색 위에 각자의 경험들이 얹혀 읽힌다. 자, 이제, 가까이, 그림 앞으로 다가가 보자. 한 순간, 다채로웠던 색들은 사라지고 빨강·초록·파랑 그리고 검정과 흰색의 선(線)만 남는다.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내 작품에서 색은 공간과 현실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 속에서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카를루스 크루즈 디에즈(1923~2019)
마술쇼 같은 신기한 그림이다. 정면에서 봤을 때는 색이 움직이는 듯했고, 오렌지 색부터 연두와 보라 같은 중간색들이 다양하게 펼쳐지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오로지 빨강·초록·파랑의 세 가지 색 뿐이다. ‘좀 전에 봤던 그 색’이 아니다. 비밀은 ‘빛’과 ‘눈(目)’에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빛의 ‘간섭 효과’와 ‘병치 효과’다. 맞닿은 색이 서로 섞여 보이고, 검은 색 선이 빨강·초록·파랑의 선을 가로 막아 색의 섞임을 끊어놓거나 착시를 일으키기도 한 결과다.
크루즈 디에즈는 1959년부터 전개해 온 이 작품을 설명할 때 “색은 표면에 있는 게 아니라 공간에 있다”고 말하곤 했다. 표면에 존재하는 색이 빛으로 반사돼 공간을 통해 우리 눈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서로 반응해 색을 만드는 과정을 설명한 말이다. 장윤진 예술의전당 큐레이터는 “작가가 안료를 섞지 않았음에도 우리 눈이 혼색해 인식한다. 작가는 이 현상 자체를 노리고 고도로 계산된 화면을 만들었다”면서 “크루즈 디에즈는 궁극적으로 ‘형태로부터 자유로운 색’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고 소개했다.
카를루스 크루즈 디에즈의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 ‘RGB, 세기의 컬러들’이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에서 9월 18일까지 열린다. RGB는 빨강(Red), 초록(Green), 파랑(Blue)의 앞 글자로, 빛의 삼원색을 뜻한다. 크루즈 디에즈는 세 가지 빛으로, 세상의 모든 색을 경험하게 해 주는 ‘빛과 색채의 거장’이다. 베네수엘라 태생이나 프랑스로 이주해 그곳에서 활동하다 눈 감았다.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인 퐁피두센터가 단일 작가 최다 작품량인 58점을 소장하고 있다. 미술사적 높은 평가에 비해 국내에서는 덜 알려진 편이라, 퐁피두가 기획한 기념전이 서울에까지 다다른 게 반갑다.
크루즈 디에즈는 1923년 8월 17일, 남미 대륙의 북단에 자리잡은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렌지 빛으로 세상을 물들이는 석양을 본 날 “색에 대한 큰 충격”을 받았고 미술을 업으로 삼는 계기가 됐다. 30대 초반이던 1955년 파리를 여행하던 중 키네틱아트(Kinetic Art·움직이는 예술)의 역사적 전시인 ‘르 무브망(Le Movement)’을 관람하고 충격에 휩싸인다. 모빌의 창시자인 알렉산더 칼더, 현대미술의 아버지 마르셀 뒤샹, 옵아트의 대표작가 빅토르 바자렐리 등이 총출동했던 기념비적 전시다.
이후 크루즈 디에즈는 광학 연구자처럼 색을 파고 들었다. 1960년 처자식을 모두 데리고 유럽으로 건너갔고 파리에 정착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인 스테델릭뮤지엄(1961) 전시부터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옵아트와 키네틱아트 특별전으로 기획한 ‘응답하는 눈’(1965)까지 굵직한 전시에 참여했다. 그 무렵 완성한 빛 공간 작업인 ‘색 포화’를 공공미술로 확장해 파리 생제르맹 거리에 ‘색 포화 미로’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도 만날 수 있는 ‘색 포화’는 미술애호가로 유명한 방탄소년단(BTS)의 RM이 퍼렐 윌리암스와 함께 진행한 음악전문지 ‘롤링스톤(Rolling Stone)’ 인터뷰 촬영 때 배경이 되기도 했다. 검은 옷을 입고 전시장을 방문한다면 RM 느낌 나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크루즈 디에즈는 1970년에는 제35회 베니스비엔날레의 베네수엘라 국가관 대표작가로 선정됐고, 베네수엘라의 마에케티아 공항의 로비를 현란한 색채 작업으로 꾸몄다. 1997년 카라카스에 크루즈디에즈 미술관이 개관했고, 2010년 광저우 광동미술관에서 첫 중국 전시를 열었으며, 2011년 미국 휴스턴미술관이 디에즈 크루즈의 최대 규모 회고전을 개최했다. 2019년 95세의 나이로 작가가 타계한 후,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조수처럼 곁에서 작업을 돕곤 했던 자녀들이 크루즈 디에즈 재단 및 스튜디오를 관리하고 있다.
이번 전시를 보고서 뒤늦게 깨달은 사실 하나. 인상주의의 마지막 화가가 어쩌면 크루즈 디에즈일 수 있다는 색다른 ‘발견’이다. ‘인상주의’는 빛과 함께 변화하는 색채를 포착하기 위해 애썼다. 그 뒤에 등장한 ‘신인상주의’는 무수한 색점을 반복적으로 찍은 조르주 쇠라의 점묘법처럼, 색채에 대한 과학적 이론에 기반해 빛과 색의 상호작용을 보여줬다. 그 다음 세기에 등장한 크루즈 디에즈는 광학에 기술까지 더해 평면, 공간설치,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등 다양한 형식을 통해 예술을 경험하게 했으니 궁극의 완성자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