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과충전 방지 기능이 없는 완속충전기 보조금을 전액 삭감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은 ‘전기차 포비아(공포증)’가 빠른 속도로 확산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화재가 발생할 수 있는 요인을 최대한 없애거나 줄이겠다는 의도지만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커지고 있다.
실제로 전력선통신(PLC) 모뎀이 장착되지 않은 충전기 예산 지원을 끊겠다는 게 정부 입장이지만 문제는 기존에 설치된 36만여 대의 충전기다. 이 가운데 약 88%인 32만 대가량이 화재 예방 기능이 없는 충전기다. 앞으로 새로 설치하는 완속충전기의 경우 화재 예방 기능을 반드시 갖추도록 유도한다는 방침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해당 충전기가 순차적으로 바뀐다고 해도 시간이 상당히 걸릴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현재 거론되는 전기차 화재 대책에 대해 논란이 크다. 별다른 근거 없이 분위기에 떠밀려 정부가 각종 대책을 쏟아내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90% 이하로 충전된 전기차만 지하주차장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완충·과충전을 하지 않으면 화재 위험성이 떨어지느냐에 대한 논란도 많다. 소방청에 따르면 주정차 중에 불이 나는 사례는 절반 정도 수준이다.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간 발생한 전기차 화재 139건 가운데 주차 중(36건)이거나 충전 중(26건), 정차 중(5건)에 생긴 것은 48% 정도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지하주차장에서 스프링클러만 제대로 작동해도 전기차 사이의 화재 전이가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나온다”며 “전기차 대책은 큰 틀에서 화재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쪽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낫지 않나 싶다”고 설명했다.
정부도 아직 최종 방안을 확정하지는 못했다. 국무조정실은 13일 방기선 국무조정실장 주재로 범부처 차관회의를 갖고 전기차 특별 무상 점검을 실시하고 전기차에 탑재된 배터리 정보를 모든 제작사가 자발적으로 공개하도록 권고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자동차 리콜센터 홈페이지에 제작사별 전기차 배터리 정보도 제공하기 시작했다. 배터리 정보는 비공개 사항이지만 최근 잇단 전기차 화재 사고로 전기차 소유주들의 불안이 커지면서 현대차·기아를 중심으로 정보 공개가 확산하고 있다. 벤츠 역시 이날 소비자 불안 등을 이유로 배터리 정보 공개에 참여했다. 포르쉐·스텔란티스·재규어랜드로버도 이달 중 공개에 나서고 테슬라·GM·폭스바겐·아우디 등도 본사와 조율 후 배터리 제조사를 공개할 예정이다.
무상 점검도 확대된다. 현대차·기아 및 벤츠는 이날부터 무상 안전 점검을 시작했고 19일부터 점검에 나서는 볼보를 비롯해 테슬라·BMW·르노·KG모빌리티는 이달 중 무상 점검에 나설 예정이다.
전기차 충전 시설을 지상에 설치하는 방안에 대해 유인책도 확대하기로 했다. 정부는 현재 건물 지하 3층까지 설치가 가능한 전기차 충전기의 경우 아파트 단지에서 지상 충전기를 구축하면 설치 비용을 지원할 계획이다.
국토교통부는 이날 자체적으로 전기차 사업자를 비롯한 유관 기관을 소집해 전기차 화재 대책 방안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기도 했다. 국토부 관계자는 “제도 정비하는 과정에서 놓치는 부분이 없는지 소비자나 기업의 입장을 면밀히 들어본 자리”라고 말했다. 특히 배터리 정보 공개를 제도화하거나 의무화할 경우에 대한 해외 완성차 업계의 반발 등도 수렴해나갈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바탕으로 현재 준비 중인 배터리 인증제도나 배터리 관리시스템(BMS) 고도화 방안, 내년 전기차 국고 보조금 산정 시 안전 정보를 제공할 경우 추가 보조금을 주는 방안 등도 구체화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일정 규모 이상의 공동주택 지하주차장 화재 대응 취약 요인에 대한 긴급 점검을 추진하기로 했다. 스프링클러 같은 소방 시설이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국조실은 “국민의 일상생활 속 안전과 직결된 사항인 만큼 대책 발표 이전이라도 개선할 수 있는 사항들은 조속히 시행하고 전기차 산업의 경쟁력 등을 높일 수 있는 종합적인 개선 과제를 구체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