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의 광주, 광주비엔날레 [아트씽]

[정준모의 여기, 역이(逆耳)]
베니스비엔날레에 韓관련전 10여건
12억원 예산 들인 광주비엔날레 전시
한글뿐인 기록물…외국 관객 배려 無
작품 간 개연성도 없는 불친절한 전시
광주시장, 재단대표 가두행진에 품바타령
한글현수막…누구를 위한 홍보인가?

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는 본전시관 전경 /서울경제DB

올해도 어김없이 베니스 비엔날레는 열렸고 필자도 동시대미술(Contemporary Art)의 순례객 대열에 끼어 길을 떠났다. 베니스는 관광객을 줄이겠다고 입도세를 1인당 5유로씩 징수했지만, 되려 방문객은 늘었다 한다. 관광객을 제한한다면서 통상 4개월 하던 비엔날레를 7개월로 늘려 방문객 늘리기에 진심인, 이재에 밝은 ‘베니스 상인’의 후예들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1895년 베니스 비엔날레 창설 후 베니스비엔날레재단은 1930년 음악제, 1932년 영화제, 1934년 연극제, 1980년 건축비엔날레, 1999년 국제무용제 등 6개의 행사를 개최한다. 이 중 미술과 건축만 격년으로, 나머지는 매년 열린다. 이들 행사를 방문하는 예술가와 관련 인사만 해도 베니스 섬이 견뎌야 하는 무게는 매우 버거울 듯하다.


동시대 미술을 다루는 미술 비엔날레는 매회 선임된 예술감독이 주관하는 ‘본 전시’ 외에 ‘국가관’ 전시 그리고 비엔날레가 공인한 30개의 병행전시(Collateral Events)가 열린다. 이외에도 메뚜기도 한철이라는 듯 베니스 기존의 미술관 박물관 외에 베니스 시내 빈 사무실이나 건물을 임차해 개최한 전시가 곳곳에 널려있다. 올해는 예년보다 2배는 많아진 듯했다. 그래서 예년과 달리 6박 7일을 베니스에서 묶으며 시간과 걸음을 줄여볼 생각으로 미리 볼 만한 전시를 점찍어 지도에 동선을 그려 바삐 다녔지만 보고 싶었던 전시의 70% 정도를 보는 데 그쳤다.


병행전시는 1995년 한국관 건립이 무산될 것에 대비해, 플랜 B로 당시 임영방 국립현대미술관장과 백남준이 아이디어를 내 ‘호랑이 꼬리’(The Tiger’s Tail)라는 특별전를 연 것이 시초다. 이후 비엔날레 기간 중 많은 작가, 화랑들이 건물을 임대해 전시하기 시작했고, 베니스는 이를 부동산 임대와 ‘공식지정’ 병행전시 로열티를 받는 수익사업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30년간 광주비엔날레 출품작들이 작은 패널로 전시되고 있다. /사진제공=정준모

광주의 자존감과 자신감

한국은 30개의 병행전시 중 4개, 그 외에 한국의 단체·개인이 기획한 5~6개를 포함해 총 10여 개의 한국 관련 전시가 열려 좀 과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중 “왜 여기서 지금?”이란 의문이 들게 한 전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정병국)가 몰타기사단 수도원에 마련한 ‘모든 섬은 산이다’(Every Island is a Mountain·4월 19일~9월 8일)와 (재)광주비엔날레(이사장 강기정)가 마련한 ‘마당-우리가 되는 곳’(Madang; Where We Become Us·2024년 4월 19일~11월 20일)이란 전시였다.


‘모든 섬’은 한국관이 설립된 1995년 이후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했던 36팀 37명의 작품을 전시하는 대규모 전시였다. 하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임에도 전시를 관통하는 어떤 주제나 특징, 주장을 담아내기보다는 우리의 비엔날레 참여작가들의 나열형 전시였다. 물론 전시 자체가 통사적인 부분이 강조된 불가피한 점을 고려하더라도 30억 원이라는 예산을 생각하면, 우리만의 잔치에 그쳤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광주비엔날레재단이 베니스 비엔날레의 공식 병행전시로 개최한 ‘마당-우리가 되는 곳’에 전시된 백남준의 작품. /서울경제DB

국가관이 몰려있는 카스텔로 공원을 나와 아르세날레로 이동하는 길목에 자리한 일 지아르디노 비안코 아트스페이스(Il Giardino Bianco Art Space)에서는 (재) 광주비엔날레의 ‘마당’전이 열렸다. 2022년 베니스 북단 외진 스파지오 베를렌디스에서 열렸던 ‘꽃 핀 쪽으로’전이 부러 찾아 나선 관객들조차 장소를 못 찾아 헛걸음했던 탓에 장소 선정에 고심한 듯했다.


전시는 “베니스 비엔날레가 창립된 지 100년 되던 해에 처음 열린 광주비엔날레가 30년 만에 세계의 선두 비엔날레가 되었다는 사실을 베니스에서 자축하며 세계를 향한 메시지를 발신”할 목적으로 열었다 한다. 하지만 광주비엔날레가 과연 선두그룹인지, 이미 선두에 선 비엔날레가 굳이 12억이란 예산을 써가며 베니스에 와서, “30년 만에 이렇게 잘 자랐습니다”라고 보고하는 전시를 해야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할 바에야 차라리 5개월 후 개막할 광주비엔날레를 소개하는 프리뷰 쇼였다면 어떠했을까.


이는 광주비엔날레의 태생적 한계인 외부의 시선과 평가를 과도하게 중히 여기는 태도와 소위 외국인들의 평가와 시선을 절대 선처럼 신봉한 입장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바뀐 것이 없었다. 전시장을 들어서자 조선 시대 국왕 즉위 후 중국의 승인을 받고자 사신을 보냈던 일이 생각나 씁쓸했다.



광주비엔날레가 주최한 '마당'전에 전시된 도록등 자료들이 책 무게 때문에 뒤틀리고 구부러져있다. 자료설명도 한글뿐이다. /사진=정준모

전시를 준비한 (재) 광주비엔날레도 전시가 조금은 민망했던지 묻지도 않은 개최과정을 “순수하게 광주비엔날레 사상 처음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베니스 비엔날레 연계전시 공모에 응모해 선정돼 개최했다”고 설명했다. 공모에 선정될 경우 연계전시란 명칭과 로고 사용료로 약 3000만 원을 내고, 또 전시실행비용이 10억 이상 지출될 일을 이사장이나 대표이사의 승인 없이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공모하는 일이 가능한 조직이라면 이는 심각한 문제다. 특히 올해 광주비엔날레는 예산이 지난 회보다 45억이 삭감된 39억이 배정됐고 결국 자본금에서 62억 원을 헐어서 써야 하는 예산 상황을 직원들도 모르진 않았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공모에 참여했다는 설명은 참으로 궁색하다. 그리고 설혹 공모에 선정되어도 긴박한 예산 상황 때문에 시장 또는 대표이사가 전시 참여를 허락하지 않을 경우, 발생할 모든 책임을 사무국 직원들이 져야 할 텐데 이런 큰일을 직원들 스스로 시장이나 대표이사 모르게 응모해 연계전시로 정해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전시가 열렸다는 식의 설명을 과연 누가 수긍할 수 있을까.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전시는 열렸고 세부 내역은 모르지만, 공식적으로 전시에는 총 12억 원이 들었다.



강기정 광주시장을 비롯해 김병내 남구청장, 박양우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니콜라 부리오 감독 그리고 광주시의회 신수정, 이귀순, 서임석시의원이 현수막을 펼쳐들고 가두행진을 하고있다.

광주비엔날레의 30년 내공

연계전 공모에 선정되자 직원들 스스로 감독과 큐레이터를 자처하며 준비했다는 ‘마당’전은 전시주제나 전시 디자인, 전시 맥락 등 모든 면에서 짜임새 없었다. 30년 역사의 내용은 빈약했고, 기법은 조악했으며, 방식은 서툴렀다. 원래 라키비움형 전시는 전시를 구성하는 자료를 관객이 어떻게 보고, 이를 이해할 것에 대한 고도의 접점이 필요하다. 대부분 이런 형태의 전시에서 전시물은 서지류 즉 도서나 리플렛, 기타 영상물이 대부분을 이룬다. 특히 언어가 다른 이들이 주 관객일 경우 전시장의 모든 텍스트를 읽고 이해할 수 없고, 또 펼쳐놓은 도서나 기록물의 특정 페이지 만 볼 수 있어 ‘읽고 이해하기’보다는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하는 것이 중요하다. 30년 역사와 광주 정신 그리고 9월에 열릴 비엔날레까지 광주의 많은 모든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는 결국 과유불급이 되고 말았다. 작은 것이긴 하지만 30년 역사를 지닌 선두 비엔날레의 전시팀이 도서와 자료를 전시한 방식은 서툴렀다. 벽에 기대어 세운 도서와 자료는 기본적인 지지대가 없어 무게 때문에, 비틀리고 주저앉아 보기 민망했다. 전시의 중요한 설명도 우리말로만 쓰여있어 누구에게 보여주려는 전시인지 모를 정도였다.


전시는 광주비엔날레 연대기로 시작했다. 하지만 초기 비엔날레의 실증적 자료수집이 미비해 깨알 같은 설명문과 패널이 주를 이루는 전시에서 많은 자료가 부수적인 전단지처럼 느껴졌다. 두 번째 섹션의 백남준의 ‘고인돌’(Dolmen·1995)과 크초(Kcho)의 제1회 광주비엔날레 대상 수상작 ‘잊어버리기 위하여’(To Forget·1995)는 단지 첫 광주비엔날레에 출품되었다는 공통점 외에 어떤 연결고리도 없었다. 이렇게 단절된 전시의 맥을 이어줄 것으로 기대했던 김실비, 김아영, 전소정의 작품은 각기 작품의 완성도는 높았지만, 전시의 흐름을 이어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광주에선 통하는지 모르지만 덩그러니 놓인 백남준 작품 한 점에, 광주비엔날레의 시상제도에 관한 설명 없이 ‘대상수상작’이라고 하면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는 서구 관객들이 탄성이라도 지를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여기에 뜬금없는 5·18 당시 주먹밥을 담았던 ‘양은 함지박’은 전시의 흐름을 깨기에 충분했다. 전시란 맥락과 흐름이 중요한 데, 이런 고려 없이 보여주어야 한다고 날 것 그대로 내어놓는 일은 전시가 아니라 폭력이다. 세 번째 비엔날레 역사를 담은 세션은 전시 리플릿, VHS, CD, 전시도면 등 실물 자료로 구성되었는데 실제 비엔날레를 증거할 자료의 수집과 발굴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당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중인 강기정 시장 일행.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

상대적으로 방콕아트비엔날레(BAB) 재단이 10월 개막하는 방콕 비엔날레 프리뷰 형식으로 마련한 ‘해상 횡단의 정령들’(The Spirits of Maritime Crossing)전은 되려 신선했다, 해양과 항해란 시점에서 디아스포라, 이주, 식민주의를 탐구하는 전시는 운하로 이뤄진 베니스와 방콕의 지리와 역사의 접점을 통해 두 도시를 하나로 이어가면서 비엔날레 간의 유대와 연대를 보여주었다.


전시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서로 다르게 읽을 수 있어서 평가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마당’전 개막 당일 참석한 광주비엔날레 관련 인사들의 행보는 당시 베니스를 방문하거나, 또는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세계 미술인들의 공통 주제로 한동안 가십처럼 입에 오르내릴 듯하다. 개막행사를 마친 강기정 광주시장을 비롯한 김병내 남구청장, 박양우 대표이사, 니콜라 부리오 감독 그리고 광주시의회 신수정, 이귀순, 서임석 의원 등은 ‘15th Gwangju Biennale’라고 적은 현수막 하단의 작은 영어 외에 모두 한글로 쓰인 ‘30주년 광주비엔날레 성공개최로 국제미술도시 도약’이란 현수막을 펼쳐 들고 징 치는 상쇠를 앞세워 시가행진을 벌였다. 남의 비엔날레에 간 손님들이 시위하듯 거리를 행진하는 것이 물론 광주비엔날레를 알리겠다는 정성은 갸륵하지만, 도를 지나 결례는 아닐지 라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행진을 하며 기념사진을 찍어댔다.


그리고 이것으로 부족했던지 돌아가며 징을 치며 시장과 전직 문화부장관이었던 대표이사 그리고 구청장, 시 위원들의 마치 품바(?) 풍의 공연을 바포레토 선착장에서 한바탕 벌였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홍보영상이라며 시장 개인 유튜브에 올려놓았다.


비엔나 소시지를 앞세워 비엔날레를 홍보하려고 했었다는 지난번 광주문화경제 부시장의 ‘비엔나 소시지’ 광고 영상은 이에 비하면 애교다. 부끄러움은 온전히 보는 이의 몫이지만 ‘국제미술 도시로 도약’하기 전에, ‘예’와 ‘격’을 갖추는 일이 더 시급한 거 아닐까. 결국 베니스에서 만난 광주와 광주비엔날레는 반가웠지만 씁쓸했다. 여전히 정치인들의 생색내기용 행사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태와 홍보를 빙자한 공무국외여행 그리고 30여 년이 지나도 외국인의 인정을 구걸하는 광주비엔날레, 베니스 비엔날레의 적통을 이어야 한다는 못난 생각과 조급한 태도는 여전했다. 30년 세월이 새삼 헛되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 정준모는 미술평론가이자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KAAAI) 대표다. 동숭아트센터와 토탈미술관 큐레이터로 시작해 제1회 광주비엔날레 전문위원과 전시부장을 맡았다. 이후 1996년부터 2006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의 최장수 학예실장을 역임하며 근현대미술의 중요한 전시들을 기획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시 공예박물관 등 국내 여러 미술관 및 문화기관 설립에 중추적 역할을 한 행정가이기도 하다. 현재는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 대표로서 미술품 감정및 미술비평, 저술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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