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리나라의 복지 예산은 122조여 원이다. 이 돈을 전 국민이 나눠 갖는다면 1인당 한 해 평균 239만 원, 매달 20만 원씩 받을 수 있다. 대신 기초 생활 보장, 취약 계층 지원, 아동·보육 등에 대한 정부 지원은 포기해야 한다.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기존 체계에서 상대적으로 복지 혜택을 더 많이 받던 저소득층이나 노인 등이 피해를 보게 된다.
일반적인 오해와는 달리 복지 확대가 보편적 복지의 확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보편적 복지 국가는 대상자 모두에게 적정 수준의 복지를 보장해야 한다. 국가 재원이 제한된 상황에서 무상 복지에 재원을 과다 투입하면 더 시급한 복지는 후순위로 밀리게 된다. 우리나라처럼 양극화가 심각한 나라일수록 선별적 복지 확대가 사회적·경제적 약자에게 유리하다. 의료·교육·주거 등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의 적절한 조합이 필요한 이유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자신의 공약인 ‘기본소득’을 보편적 복지로 포장한다. 하지만 보편적 복지 국가란 몸이 아프거나 일자리를 잃었을 때 누구나 기본적인 의료·교육·생계 등을 보장받아 재기할 수 있는 사회이다. 무차별적으로 현금을 나눠주는 기본소득 제도는 소득재분배 효과를 떨어뜨려 보편적 복지와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이재명식 기본소득은 ‘사회 구성원 모두의 실질적 자유 구현’이라는 기본소득의 근본 철학과도 거리가 멀다. 기본소득 담론에 따르면 모든 개인의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하려면 이론적으로 국내총생산(GDP)의 25%를 지속적으로 나눠줘야 한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명목 GDP는 2402조 원이다. 25%는 600조 원으로 올해 총예산(656조 6000억 원)과 거의 맞먹는다. 국방·치안·교육·복지 등에 소요되는 거의 모든 예산을 전 국민이 현금으로 나눠 갖자는 소리다. 이런 나라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맹점 탓에 이 대표가 ‘증세 없는 기본소득’을 실험하겠다면서 들고나온 것이 ‘전 국민 25만 원 지원 특별법’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일회성 푼돈으로 국민들의 실질적인 자유가 구현될 리 만무하다. 지속 가능하지도, 충분하지도 않다는 점에서 ‘가짜 기본소득’에 불과하다. 4·10 총선 승리를 자축하며 국민 혈세가 자기 돈인 것처럼 한 번 생색내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퍼주기 포퓰리즘에 불과한데도 국민 절반가량은 찬성한다는 것이 여당의 고민이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무조건 반대만 할 수 없어서 대안으로 들고나온 것이 ‘격차 해소’다. 재원의 우선순위를 정해 취약 계층에 집중 투입하겠다는 것이다. 보수 여당이 승자 독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 약자, 청년 등에 주목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경제 민주화’를 내걸고 집권에 성공했듯이 보수의 외연 확대는 진보적 의제를 보수적 시각으로 통합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격차 해소 대책이 보수 정당만의 어젠다 설정 차원에서 나왔는지는 의문이다. 한 대표가 요즘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금융투자소득세 폐지가 대표적이다. 내 집 마련이 막힌 청년들을 위해 자본시장을 띄워 자산 축적의 기회를 주고 세대·계층 간 격차를 줄이겠다는 취지라고 한다. 금투세 완화나 유예는 주가 ‘밸류업’을 위해 필요하지만 주가가 오르면 양극화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본질 왜곡으로 들린다. 취약 계층 폭염 지원책, 난임 시술 비용 지원 등의 대책도 중구난방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흔히 보수의 가치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기회의 균등, 노블레스 오블리주 등이 거론된다. 하지만 한국 보수 세력은 원칙과 철학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지적이 많다. 윤석열 정부의 법치주의는 통치자도 법의 구속을 받는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아니라 권력자가 법을 통해 통치하는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쯤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 대표는 일회성 격차 해소 대책을 남발할 게 아니라 성장과 분배 등에 대한 보수의 원칙과 가치부터 명확하게 해야 한다. 그런 다음 저출생·고령화, 저성장과 양극화 고착화 등 우리 사회의 문제 해결을 위한 장기적 비전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미래 성장 동력 창출, 중산층 확대, 연금 개혁 등에 대해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내놓아야 수권 능력을 갖춘 리더로 인정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