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사협회가 31일 임시대의원총회에서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는 대신 현 집행부 중심 투쟁체제의 유지를 선택하면서 임현택 회장은 의대정원 증원, 간호법 제정 등 반대 투쟁에서 일단 재신임을 받았다. 최근 일부 대의원들을 중심으로 임 회장에 대한 불신임 청원이 나온 데 이어 대의원총회에서 비대위 구성 안건까지 등장한 와중에 한숨 돌린 셈이다.
임 회장과 집행부가 이 같은 반대여론에도 대의원총회의 지지를 얻게 된 건 아직 취임 4개월밖에 안 됐다는 점에서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은 결과로 해석된다. 임 회장은 이날 단식투쟁 6일째를 이어가며 건강 악화로 병원에 후송된 가운데 인사말에서 “분골쇄신의 각오로 싸울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의협도 투쟁선언문을 통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며 강경한 의지를 재확인했다. 하지만 반 년 넘는 의정갈등의 핵심인 전공의들이 여전히 임 회장 체제에서 함께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라 리더십에 균열이 가속화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의협은 31일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에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어 ‘의대정원 증원 저지·필수의료 패키지 대응·간호법 저지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설치에 대한 투표를 진행했다. 하지만 투표자 189명(총원 242명) 중 찬성 53명, 반대 131명, 기권 5명으로 부결됐다. 현 회장단이 의대증원 저지에 대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에 따라 비대위가 대정부 투쟁을 이끌게 한다는 의도였으나 통과되지 못한 셈이다.
의협 대의원회는 총회 후 결의문에서 “집행부가 의대정원 증원 저지·필수의료 패키지 대응·간호법 제정 등을 총망라해 사즉생 각오로 총력을 다할 것을 결의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대정원 문제의 원점 회귀, 정부의 필수·지역의료 시스템 개선, 간호법 제정 즉각 철회를 촉구했다. 대의원회는 집행부를 향해 “지금보다 더 많은 노력을 다해달라. 대의원회는 절대적 지지와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결과에도 대의원총회 곳곳에서는 파열음이 나왔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날 임 회장에 대해 “그만두지 않으면 끌어내려야 한다”고 직격했다. 이날 총회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의협과 임현택 회장은 14만 의사를 대표하여 무엇을 하고 있느냐”며 “회장과 집행부는 그 역할이 있다. 감당하지 못하면 물러나야 하고, 물러나지 않으면 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위원장은 “비대위 구성은 결코 해답이 될 수 없다”며 “대전협 비대위는 본인 면피에만 급급한, 무능한 회장과 함께 일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김교웅 의협 대의원회 의장은 총회 후 백브리핑에서 “박 위원장은 처음부터 반대 의견이 확실했다. 그렇지만 임 회장은 정식적으로 뽑힌 회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의원 중 박 위원장에게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현 사태 속 전공의 위치를 고려해 의견을 들었다고 전하며 “공식 석상에서 두 사람이 만나 의견 교환을 할 수 있도록 자리는 계속 만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조병욱·조현근 의협 대의원은 지난 28일부터 회원들을 대상으로 임 회장에 대한 불신임 청원 동의를 받고 있다. 청원은 다음달 27일까지 진행되며 회원의 4분의 1 이상이 동의하면 발의된다. 이들은 “의협이 임 회장의 임기가 시작된 이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고, 사직 전공의들과 휴학 중인 학생에 대해서도 분란만 만들어냈다”며 “말만 앞세우고 뒷수습도 제대로 하지 못해 부끄러움은 회원들의 몫으로 남겨왔다”고 비판했다.
이런 가운데 의협 주요 인사들은 이날 대의원총회에서 정부와 정치권을 향해 강경한 발언들을 쏟아냈다. 대의원인 김성근 가톨릭의대 비대위원장은 투쟁선언문에서 “대통령이 의대증원이 마무리됐다고 한다. 수시 모집이 곧 시작되지만 선발은 12월”이라며 “수시 모집이 정원 확정이라고 미리 (고개를) 떨구지 말자.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수들이 힘겹게 버텨오던 대학 병원도 응급 의료부터 무너지고 있다. 연일 언론에서 추석 연휴 응급실 대란이 일어날 거라고 대서특필하고 있다”며 “이런 꼴을 만들어 놓은 당사자들은 국민 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진료지원(PA) 간호사 합법화를 골자로 한 간호법 제정안을 두고 강한 비판이 이어졌다. 김교웅 의장은 “법과 원칙과 절차를 무시한 채 통과시키라는 명령 하에 일사불란하게 아무 생각도 없이 친위부대처럼 (간호법을) 통과시켰다”며 “우리 모두는 10년 후를 생각해 사즉생의 각오로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병원장과 의대 보직교수들을 향해 “단지 의사가 환자 곁에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조차도 내려놓아야 한다”고 요구했으며 개원의들에게는 “젊은 의사들에게 선배 의사들의 행동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간이다. 지금 바로 일어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편 임 회장은 이날 저녁 건강 악화로 병원으로 후송됐다. 의협 관계자는 “폭염 속 극심한 탈수와 어지러움 증상으로 30일부터는 몸을 일으키기조차 어려웠고, 당뇨·고지혈증 등 기저질환이 악화됐다”며 “특히 부정맥 증상이 심화됐고 의식 저하로 위험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의협은 “임 회장이 의료계 주요 인사들의 단식 중단 권고에 따라 응급치료를 받고 회복하여 투쟁을 지속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임 회장은 앞서 총회 인사말에서 “분골쇄신의 각오로 대한민국 의료를 살리기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며 “저와 저희 집행부를 믿고 힘을 실어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정부가 의사를 악마화하고 의료 시스템 붕괴라는 절벽을 향해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달려가고 있다”며 “단순히 의대정원,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 간호법에 국한된 투쟁일 수 없다. 대한민국의 마지막 생명불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