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3월 이화여대 강당에서는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1933~2014)가 이끄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첫 번째 내한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세종문화회관의 전신인 서울시민회관의 화재로 마땅한 공연장이 없어 이화여대에서 연주회가 개최된 것이다. 아바도의 빈 필은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 심포니 3번 ‘영웅(Eroica)’과 브람스(Johannes Brahms·1833~1897) 심포니 3번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해 한국에서 열리는 첫 공연의 기대치를 높였다. 그러나 임시 공연 시설은 세계 최고의 단원들을 여러가지로 당황스럽게 했다. 별도 편의시설을 제공받지 못한 연주자들은 관객들과 뒤엉켰고, 이동 동선도 따로 없었다. 급기야 공연 중 신촌역을 출발한 열차가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 공연장이 진동해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결국 지휘자는 특별한 해프닝을 음악 속에 의연히 담아내지 못하고 커튼 콜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관객들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고 박수 갈채가 길게 이어졌다. 공연이 귀했던 시절, 음악이 절실했고 이를 공명으로 끌어 안고자 열망했던 사람들에게 그 순간은 잊지못할 한 장면이 되었으리라.
그 공연에는 조각가 권진규(1922~1973)도 앉아 있었다. 그의 곁에는 음악에 조예가 깊은 친구들인 핵물리학자 박혜일(94)과 영문학자이자 음악평론가 안동림(1932~2014)이 함께했다. 지금처럼 실연을 듣기가 쉽지 않았던 시대에, 음악을 좋아했고 특히나 베토벤을 흠모했던 권진규에게, 삶의 마지막으로 향하는 시기에 마주한 이 공연은 어떤 의미가 되었을까.
권진규는 음악을 사랑했다. 그가 조각을 하기로 결심한 이유도 음악에 기인한다. 1943년 형과 함께 1929년에 건립된 일본 공연장의 시초인 히비야 공회당 음악회에 갔다. 음악을 듣던 중 “‘음(音)’을 양감으로 표현할 수 없을까”라고 생각한 것이 결국 권진규를 조각가로 이끌었다.
권진규가 베토벤을 각별하게 여겼던 것은 부르델(Antoine Bourdelle·1861~1929)의 영향이 컸다. 부르델은 로댕(Auguste Rodin·1840~1917)의 제자이나 스승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작업 세계를 구축했고 구조의 근원적 본질을 찾고자 했던 조각가다. 또한 베토벤의 모습을 수없이 변주하여 80여 점의 작품을 남겼으며 이를 통해 그의 영혼과 만나고자 했다.
권진규의 예술적 삶에서 베토벤은 적지않은 부분을 차지했다. 성북구의 동선동 아틀리에에는 늘 그의 음악이 흘렀고, 반복해서 읽었던 로맹 롤랑(Romain Rolland·1866~1944)의 ‘베토벤의 생애’는 그에게 가장 소중한 책이 됐다. 그런 그이기에 병약한 상황에서도 빈 필이 연주하는 ‘영웅교향곡’을 결코 놓칠 수 없었을 것이다.
베토벤은 귓병이 악화됨을 알게 된 직후인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유서를 썼다. 유서에서 그는 “…비록 내 운명이 가혹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예술적 소양을 다 펼칠 기회를 갖기 전에 죽음이 닥쳐온다 해도, 이대로 난 만족한다. 죽으면 끝없이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겠는가. 죽음이여, 올 테면 오너라, 용감하게 그대를 맞아주마…”라고 처절하게 외친다.
다행히 베토벤은 예술적 변화를 통해 당시 드리웠던 죽음의 그림자를 벗어난다. 오히려 유서를 쓴 이후, 고전시대의 음악 형식을 탈피하며 낭만과 자유가 꿈틀대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시작한다. ‘영웅’은 바로 이 전환의 시기에 작곡된 교향곡이다. 특별히 2악장에 ‘장송행진곡(Marcia funebre)’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처절한 슬픔이 하나의 악장을 온전히 이루고 있지만, 그 안에는 한줄기 빛과 드라마가 담겨 있다. 천상의 소리로 애절하게 이어지는 오보에의 선율과, 마지막 첼로와 콘스라베이스로 구현되는 강하고 극적인 프레이즈가 심연의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이제 그에게 음악은 더 이상 음악 자체가 아닌 초월을 향한 무극(無極)이다.
권진규는 대상을 형상화 하는데 있어 내적 진실을 추구했다. 그 역시 시대와 유연하게 타협했던 예술가는 아니다. 그는 조각가로서 고독했다. 그가 지향했던 작업 세계는 본질로 끝없이 향하는 보이지 않는 영원의 세계였다. 그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바라보았다는 ‘가사를 입은 자소상(1969~1970, 테라코타)’ 앞에 서면 그 모든 세상의 고뇌를 넘어선 듯한 표정으로 평안에 이른 조각가 자신의 모습과 만나게 된다.
결국 권진규는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베토벤의 ‘영웅’을 들은 지 불과 한달 여 만이다. 그의 마지막 콘서트에서 울려 퍼진 ‘에로이카’는 그렇게 조각가의 진혼곡이 되었다. 죽음은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리라. 베토벤이 그러했듯이, 권진규 또한 자신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였음을.
▶▶필자 김보라는 성북구립미술관 관장이다. ICOM 한국위원회와 (재)내셔널트러스트의 이사이며, 서울시 박물관미술관 진흥정책 심의위원, 경기도 건축물 미술작품 심의위원이다.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큐레이터로 재직했고, 경기도미술관에 근무하며 건립 TF 및 학예연구사로 일했다. 국내외 전시기획과 공립미술관 행정에 대한 경험이 풍부하다. 2009년 자치구 최초로 개관한 성북구립미술관의 학예실장을 거쳐 2012년부터 지금까지 관장을 맡고 있다. 윤중식·서세옥·송영수 등 지역 원로작가의 소장품을 확보해 문화예술 자산에 대한 연구 기반을 확장했고 예술가의 가옥 보존과 연구를 기반으로 성북구립 최만린미술관을 개관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23년 ‘박물관 및 미술관 발전유공’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