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점이 어디지?”
존 배의 작품 ‘인볼루션(Involution)’을 처음 보면 누구라도 이런 의문을 품는다. ‘인볼루션’은 철사를 격자로 직조해 구부려 만든 볼링핀과 같은 형상을 사과와 같은 형태의 커다란 구체가 감싸고 있고, 또 그 형상을 다른 구체가 감싸고 있는 기이한 조각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철사 조각은 블랙홀처럼 관람객을 작품 앞으로 끌어당기는 오묘한 힘을 지녔다.
‘철의 작가’ 존 배(87)가 프리즈 서울 개막을 앞두고 한국을 찾았다. 10년 만에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개인전 ‘운명의 조우’를 위해서다. 갤러리 현대는 그의 70여 년 예술적 여정을 집약하는 40여 점의 작품을 10월 20일까지 소개한다.
1949년 12세 때 미국으로 이주한 작가는 1952년 웨스트버지니아주 휠링에 있는 오글베이연구소에서 첫 개인전을 열며 작업활동을 시작했다. 철을 주재료로 한 작업은 1960년 대부터 시작했는데, 용접을 하면 부드러워지는 철사의 특성을 이용해 고체인 철을 액체처럼 자유롭게 변형하는 것이 그의 작업의 핵심이다.
전시의 주제 ‘운명의 조우’는 계획 없이 그러나 운명처럼 우연히 만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의 조각은 비어있는 공간에서 점이나 선으로부터 시작된다. 음표가 서로 대화해 아름다운 선율로 이어지듯 그의 작품 속 점과 선은 작가를 매개로 해 서로 운명의 조우를 맞이해 하나의 조각 작품을 완성한다. 결과물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자신이 제작한 조각 작품이 어떤 모습을 하게 될지 그 결과는 작가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작가는 그저 “어떤 행동을 한 뒤에 결과를 쳐다보고 대화하고 싶다”고 말한다. 우연을 추구한 작품의 결과물 치고는 필연적이다. 작가 스스로 오랜 시간 미술뿐 아니라 음악, 과학, 동양 철학 및 문학을 횡단하는 학제간 탐구를 지속해 온 영향이 크다.
1937년생 작가는 이제 서 있기도 쉽지 않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그의 손가락은 용접과 철사 작업으로 인해 굽었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신작 ‘천국과 지구(Heaven and Earth)’를 통해 육체적 고충도 예술가의 열정은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신작은 바닥부터 짧은 철사를 켜켜이 쌓아 올리는 형태로 제작된 여러가지 조각 세트로 구성돼 있다. 연속된 철사 조각들은 마치 음악처럼 리듬감 있게 곡선의 조각이 되어 서로 어우러진다. 전시는 10월20일까지. 관람은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