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을 중심으로 의대 정원 증원 등을 논의하기 위한 여·야·의·정 협의체 출범이 임박했지만 의료계가 '2025학년도 증원 백지화' 없이는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또다시 답보상태다. 의사단체 내부에서도 "이미 입시 절차가 시작된 만큼 내년도 의대 증원을 뒤집긴 어려운 것 아니냐"며 "한발 물러서 실리를 챙겨야 한다"는 말이 나오지만 '타협을 권하는 건 배신자'라는 강경파에 밀려 소수 목소리에 그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의협)는 2025학년도 대입 수시모집이 시작된 9일 '의료정상화를 위한 대국민 호소문'을 내고 의대 증원 백지화를 재차 요구했다. 2025년과 2026년 의대 증원을 취소하고, 2027년 정원부터 논의하자는 게 의협의 제안이다.
의협은 "의료현장의 위기는 점점 심해지고 있다"며 "추석이 끝이 아니고 응급실만의 문제도 아니다.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난 후에 대학병원들의 진료는 한계에 달했고 남아있는 의료진은 하루하루 지쳐가고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위기를 해결한 유일한 방법은 전공의들의 복귀인데, 2025년을 포함한 의대 증원 취소가 없으면 전공의들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들은 정부를 향해 "2025년을 포함해 모든 증원을 취소하고 현실적으로 논의가 가능한 2027년 의대 정원부터 투명하고 과학적 추계방식으로 양자가 공정하게 논의할 것을 제안한다"며 "필수의료 정책패키지 등 국민 폐해가 확실한 정책 모두를 폐기하고 의료 정상화를 위해 진정성을 갖고 대화에 임하라"고 촉구했다. 또 "정부가 과거 수차례 약속한 의정 합의의 결과를 국민 앞에 밝히고 미이행건에 대한 이행을 약속해달라"고 덧붙였다. 백보를 양보해서 정부가 맞다고 해도 2025년과 2026년 증원을 안 할 때 7년 후 의사 수의 차이는 2% 정도에 불과하며,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매우 적다는 게 의협의 논리다.
이들은 "정부는 수험생의 혼란을 얘기하지만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한 증원 취소는 수험생과 학부모님들도 이해해 주실 것이라 믿는다"며 "올해 증원을 강행하면 내년부터 수년간 의대와 수련병원의 교육은 정상적으로 이뤄질 수 없다"고 단언했다. 내년에 입학하는 신입생들이 휴학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는데다 만약 휴학 중인 의대생들이 돌아올 경우 도저히 정상적인 교육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의료계 내부에서는 '의대 증원 백지화 없이는 어떤 대화의 장에도 나서선 안된다'는 강경파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특히 협의체에 참여한다고 해도 결국 정부 입맛대로 움직이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임현택 의협 회장은 전일 자신의 SNS에 "2025년 의대 정원 원점 재논의가 불가한 이유와 근거는 무엇입니까?"라며 “의료대란 사태를 해결할 여·야·정의 합리적인 단일안을 요구한다”고 올렸다. SNS에서는 '여·야·의·정 협의체의 시나리오'라는 제목의 글이 공유되고 있다. 협의체에서 '2025년 증원은 이미 결정됐으니 바꿀 수 없다. 동의하느냐'는 안건이 올라오면 여야정 전원과 의사 일부의 동의 하에 의결되고 2026~2029년도 의대 정원 증원 역시 정부와 국회,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이른바 '과학적추계기구'를 통해 1000~2000명 사이로 결정될 것이 자명하다는 게 해당 글의 골자다. 혼합진료 금지부터 개원면허제, 의사사과법, 의료과실 두텁게 보상법 등 최근 정부가 내놓은 의료개혁안이 줄줄이 통과되고 결국 전공의들은 아무도 복귀하지 않을 것이란 비관적인 전망도 담겼다.
정부가 현 의정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보다 전향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는 이날 성명을 내고 정부에 "합리적인 단일안을 내달라"고 역제안했다. 정부가 (의정갈등을 해소할) 합리적인 안을 제시해달라고 의료계에 요구하자 정부에 또다시 공을 넘긴 것이다.
비대위는 "여러 의대 교수들이 그간 과학적 근거에 의한 합리적 의대정원 결정을 주장했지만 정부는 일관되게 제시한 의료계의 의견을 무시했다"며 "정부가 과학적 분석에 기반한 의료인 수요 추계를 제시해 더 이상 논란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사태의 본질은 의대 증원이 아니다. 2020년 의정 합의안의 일방적인 파기로 대표되는 신뢰의 붕괴가 핵심"이라며 "정부가 과학적 수급 분석을 근거로 필요한 최소한도의 규모로 의대 증원을 결정했다면 그 근거를 공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작 의정갈등의 키를 쥐고 있는 젊은 의사들은 침묵하고 있다.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와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의대협)는 여·야·의·정 협의체와 관련해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지난달 말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면담을 가졌던 박단 대전협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달 25일 페이스북에서 “젊은 의사들의 요구는 일관적이다. 한동훈 당 대표와 여당은 복잡한 이 사태의 본질을 세심히 살펴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을 설득해 주길 기대한다”고 밝힌 이후 여·야·의·정 협의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전날 서울 용산구 소재 의협 회관에서 열린 '근골격계 초음파 강좌'에는 140명이 넘는 사직 전공의들이 몰렸다. 정치권에서 의정갈등을 해결하겠다며 협의체 구성 움직임을 보이는 것과 별개로 대다수 사직 전공의들은 수련병원에 복귀하는 대신 일반의로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빅5’로 불리는 대형병원 전공의 대표들이 연이어 참고인 신분으로 경찰에 출석하면서 의료계 내부 여론은 한층 악화하는 분위기다. 서울경찰청 공공범죄수사대는 이날 오전부터 김은식 세브란스병원 전공의 대표와 한성존 서울아산병원 전공의 대표를 서울 마포구 광역수사단 청사로 불러 참고인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들은 출석에 앞서 “전공의 집단 사직은 개인의 선택”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임현택 의협 회장과 전 의협 비대위의 김택우 위원장, 주수호 홍보위원장 등 의협 전·현직 간부 6명을 의료법 위반, 형법상 업무방해, 교사·방조 등 혐의로 입건해 지난 2월부터 수사를 이어오고 있다. 앞서 박 위원장과 박재일 서울대 전공의 대표를 각각 지난달 21일, 지난 5일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