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를 포기해.”
고귀한 신분을 가진 한 여성이 자신의 약혼식에서 춤을 추기로 한 댄서를 방으로 불러 말합니다. 좀 기이하긴 하지만 이 댄서는 여성의 정혼자의 여자친구 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댄서는 자신의 남자친구가 주인공인 약혼식에서 춤을 출 예정이고, 남자친구의 정혼자에게 ‘헤어져 달라’는 말을 듣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 앞에서는 누구도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댄서는 코웃음을 치며 단검을 들어 여성을 죽이려 하죠. 안타깝게도(?) 살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댄서는 도망칩니다. ‘이별’ 회유하다 졸지에 죽을 뻔한 여성은 분노가 치밀었고 ‘댄서를 죽이겠다’고 결심합니다.
‘부부의 세계’ ‘아내의 유혹’에서나 볼 법한 클리셰로 가득한 이 막장 드라마는 인도를 배경으로 한 발레 작품 ‘라 바야데르(La Bayadere)’의 한 장면입니다. 러시아의 고전 발레를 완성한 프랑스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가 제작한 ‘라 바야데르’는 러시아 황실 발레단(현 마린스키 발레단)이 1877년 초연한 고전 발레 중 하나인데요. 최근 이 작품이 국내에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국내 양대 발레단인 유니버설발레단과 국립발레단이 각각 9월과 10월에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에서 ‘라 바야데르’를 공연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매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호두까기 인형’을 공연하는 것이 아니라면 두 발레단이 비슷한 시기에 같은 작품을 공연하는 일은 흔치 않다고 해요. 특히 이 작품은 100여 명의 무용수가 수백 벌의 의상을 갈아 입는 ‘발레계의 블록버스터’이기 때문에 두 발레단이 각각 어떤 공연을 보여줄 지 큰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사실 라 바야데르의 줄거리는 막장에 길들여진 한국인들은 누구라도 다음 내용을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지나치게 통속적입니다. 하지만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게 바로 ‘막장’ 드라마의 매력이죠. 이 작품도 그렇습니다. 줄거리를 볼까요.
인도의 제사장 브라만은 무희 니키아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니키아의 마음은 용맹한 전사 솔로르에게 향해 있죠. 제례가 끝나고 모두 떠난 사원에 남은 니키아와 솔로르는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데요. 이 모습을 그만 제사장 브라만에게 들키고 맙니다. 브라만은 이 사실을 국왕에게 알립니다. 솔로르는 국왕의 딸 감자티와 약혼을 할 예정이었거든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던 니키아는 ‘감자티의 결혼식(이면서 동시에 솔로르의 결혼식)’에서 춤을 추기로 약속했는데요. 니키아가 예비 사위인 솔로르의 여자친구라는 사실을 안 국왕은 분노에 휩싸여 니키아를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이같은 사실을 알게 된 감자티는 니키아를 불러 회유합니다. ‘솔로르와 헤어지면 돈을 주겠다’는 거죠. 하지만 순순히 말을 들을 니키아가 아닙니다. 니키아는 단검을 들어 감자티를 죽이려고 합니다. 간신히 목숨을 구한 감자티도 아버지처럼 분노에 휩싸입니다. 니키아를 죽이기로 결심하죠. 목숨까지 걸게 된 상황이지만 니키아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감자티와 솔로르의 약혼을 축하하는 파티에서 두 사람을 바라봅니다. 그때 한 수도승이 다가와 꽃바구니를 전합니다.
“솔로르가 보낸 게 틀림 없어"
니키아는 꽃을 솔로르가 보낸 정표라고 생각하고 기쁨의 춤을 춥니다. 하지만 꽃바구니 속에는 독사가 숨어 있었어요. 더그만타 국왕의 계략이었죠. 독사에 물린 니키아는 점점 죽어갔고, 니키아를 사랑했던 제사장 브라만이 그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니키아는 죽고 맙니다.
줄거리는 대체로 유사하지만 유니버설발레단과 국립발레단이 공연하는 라 바야데르의 결말은 완전히 다릅니다. 국립발레단의 솔로르는 자신 때문에 니키아가 죽게 되자 큰 슬픔에 빠지죠. 절망한 솔로르는 꿈 속에서 망령들의 왕국에 가게 되고 그 곳에서 니키아를 발견합니다. 솔로르는 니키아를 따라가며 세속을 떠나는 것으로 극은 마무리됩니다. 반면 유니버설 발레단의 솔로르는 꿈 속에서 니키아를 발견하고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하죠. 현실에서는 양다리를 걸쳐 진짜 사랑을 잃고 말았지만, 꿈에서는 진실한 사랑을 선택합니다.
결말만 다른 건 아닙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솔로르를 연기하는 발레리노도 다릅니다.(물론 발레리나도 다릅니다.) 지금 이 작품이 국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볼쇼이 발레단과 함께 세계 최정상의 발레단인 ‘마린스키 발레단’에 입단하기로 한 전민철이 유니버설 발레단의 솔로르 역을, 이미 2011년 한국인 최초로 마린스키에 입단한 세계 최정상의 발레리노 김기민이 국립발레단의 솔로르 역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32세 김기민의 솔로르와 20세 전민철의 솔로르는 어떻게 다를까요. 아마도 많은 발레팬들이 이 부분을 가장 궁금해 하고, 기대하고 있을 텐데요. 기자 역시 그 부분이 가장 궁금합니다. 그래서 최근 진행한 인터뷰에서 ‘선배와 함께 같은 역할을 맡았는데 나만의 매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어요. 이에 대한 전민철의 대답은 명쾌했습니다.
“춤은 인생의 경험치에 따라 다르게 풀리고 다르게 해석된다고 배웠어요. 선배들의 춤은 저와 또 다른 매력이 나올 거 같고, 제게서는 20대 전민철이 표현할 수 있는 솔로르가 나오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