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내에서 해결해야 할 정치적 중대 사안을 재판에 가져가 판단을 받는 이른바 ‘정치 사법화’에 대한 우려 목소리가 커지는 배경에는 ‘추락하는 사법부 신뢰’가 자리하고 있다. 여야가 연이은 고소·고발로 정치적 분쟁을 사법부에 떠넘기는 정치 사법화는 부추기면서도 정작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충돌’ 사건 등 직면한 재판에는 미온적 태도를 나타내고 있는 탓이다. 게다가 여야는 ‘유불리’에 따라 법원 판결에 불만을 드러내는 등 불복하기 일쑤다. 특히 국회 윤리위원회에서 해결해야 할 사안마저 ‘국회선진화법(국회법 165·166조)에 따라 고발한다’거나 ‘판사도 선출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마저 서슴없이 하고 있어 ‘정치권이 사법 근간마저 파괴하려 한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재판 지연에 판결도 인정치 않는 무분별한 ‘편 가르기’식 비판으로 사법부에 대한 불신만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정치권의 ‘사법부 무한 흔들기’다.
16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남부지법 형사11부(정도성 부장판사)·형사12부(당우증 부장판사)는 ‘패스트트랙 충돌’ 사건과 관련 여야 전·현직 의원 등에 대한 각각 34회, 38회 공판을 오는 23일과 11월 15일 연다. 법의 심판대에 오른 이들 가운데 현직 의원은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각각 6명과 2명이다. 전직 의원도 각각 17명, 3명이 포함됐다.
양당 전·현직 의원 등은 2019년 4월 선거제 개편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 등의 패스트트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회 내에서 극한 대치로 물리적 충돌을 일으켜 각각 특수공무집행방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공동 폭행)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하지만, 1심 결론은 4년째 ‘함흥차사’다. 이 기간 각각의 재판장만 3차례나 변경될 정도다.
법원 측 관계자는 “두 재판 모두 피고인·증인이 수십 명에 달하는 데다 감금, 공동 퇴거 불응, 공용서류 은닉, 국회법 위반 등 혐의도 다양해 간단한 사안으로 볼 수 없다”며 “일부 피고인들은 국회의원으로서 공판 기일 변경 신청을 해서 재판이 좀 장기화된 것 같다”고 밝혔다. 이어 “피고인은 물론 증인도 출석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공판기일이 공전할 수 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피고인이 여럿인 데다 혐의가 복잡한 만큼 재판도 길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기소된 일부 의원들이 총선 준비, 코로나 19 사태 등을 이유로 재판 연기를 요청하거나 출석하지 않은 점도 영향을 줬다는 것이다.
실제로 재판에 출석하지 않아 피고인 소환장이 발송된 날짜 만도 자유한국당·더불어민주당 등 두 당이 각각 26일, 8일에 달한다. 재판 공전으로 이 기간 국회의원 선거만 2차례 진행돼 피고인의 직업도 전·현직 의원을 오고 갔다. 기소라는 사법 리스크를 안고도, 법원 판결이 늦춰지면서 국회의원 출마의 기회는 오롯이 보장받은 셈이다.
반면 여야는 각종 수사와 법원 판단·재판 진행 상황에 대해 유불리에 따라 날 선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지난 10일 열린 김복형 헌법재판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는 여야가 후보자 자실 검증보다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 의혹 등 정치 현안에 대한 질의를 쏟아냈다. 전현희 민주당 의원의 경우 윤석열 대통령의 거듭된 재의요구권(법률안 거부권) 행사를 질타하며 “대통령이 본인과 배우자와 관련된 특검법을 거부하는 것은 헌법 위반이라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성윤 민주당 의원은 “후보자의 가족이 타인에게 300만원짜리 명품가방을 받았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며 “김 여사가 가방의 국가 귀속을 요구했는데, 그게 맞냐”고 질문을 던졌다. 이에 송석준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청문회 때도 그랬고, 야당은 계속 부적절한 사례에 대한 가치판단적 답변을 강요한다”고 꼬집었다. 이어 “야당은 툭하면 특검한다, 탄핵한다며 발목잡기만 하고, 심지어 계엄설까지 제기한다. 제정신이냐”며 후보자의 의견을 물었다. 지난 7월 22일 열린 노경필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는 이재명 민주당 당대표 후보의 재판 일정을 두고 여야가 충돌했다. 앞서 대법원은 수원지법에서 열리는 대북 송금 사건 재판을 서울중앙지법에서 진행 중인 대장동·백현동 사건 등 3건의 재판과 병합해 달라는 이 후보의 요청을 기각한 바 있다. 김기표 민주당 의원은 “이 후보는 현재도 일주일에 2번에서 4번 재판을 받는데, 수원에서 따로 받으면 일주일 내내 받아야 한다”며 “현실 정치인이 날마다 재판받게 하는 문제,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은 채 재판받게 하는 문제는 법원이 제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박준태 국민의힘 의원은 “유력 정치인은 재판이 지연돼 법정 기간을 훌쩍 뛰어넘는 사례가 많다”며 “이 후보는 선거법 재판을 받고 있는데, 1심만 2년째 진행 중”이라고 꼬집었다. 신임 대법관·헌법재판관을 검증하는 자리가 오히려 수사·재판 등에 대한 질의로 가득찼던 셈이다. 여기에 이미 확정된 판결에 대해서도 날 선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 정치검찰사건조작특별대책단을 지난달 13일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에 대한 1심 판결에 대해 “수원지방법원 판결은 절차적으로 반인권적”이라며 “객관적 물증에 반하는 증거 판단, 증거와 정황을 종합적으로 보지 않은 편파적인 사실 인정, 설득력 없는 법리 판단으로 일관된 검찰의 의견서를 그대로 수용한 편파적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철저한 계산법에 따라 법원 판단에 대해선 비판을, 재판 진행에 대해선 압박을 하는 등 여야가 ‘세치 혀’로 사법부를 옥죄고 있다는 게 법조계 안팎의 대체적 시각이다.
10년 넘게 법조계에 몸 담고 있는 한 변호사는 “법을 믿지 마라, 법원도 믿지 마라는 식으로 정치권이 사법부를 흔들고 있다”며 “정치 사법화로 인해 국민들이 사법 불신만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이미 만들어진 약속이 잘 지켜지고 있는 지 보는 게 사법부의 본연의 역할”이라며 “정치적으로 논쟁이 이뤄져 답을 찾아야 하는 영역에 대해 사법부가 답을 내리라고 하는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이어 “정치 사법화로 인해 다양한 의견을 듣고 결정하는 등 절차를 통해 합의에 도달하려는 민주주의의 장점마저 희석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각종 정치 사안과 연관된 재판에 대해 여야가 정치적 ‘셈법’을 적용하면서 사법부 신뢰 추락만 부추기고 있다는 얘기다.
재판에 대해 큰 소리를 내는 것과 달리 판사 임용 최소 경력 기간 등 입법 사안에 대해선 국회가 사실상 ‘무관심’ 모드다. 제21대 국회에서 법원 조직·양형기준·신속한 재판·재판 독립 등과 관련한 법원조직법 일부 개정법안이 61건이 발의됐으나 판사 임용 최소 법조 경력 적용시기는 유예한다는 내용의 단 1건만 국회 문턱을 넘을 정도다. 7건은 대안반영 폐기됐다. 이외에는 임기만료 폐기(49건)되거나, 부결(1건), 철회(2) 등으로 ‘없던 일’이 됐다. 오히려 야권은 현재 ‘법 왜곡죄’ 형법 개정안 신설이 추진 중이다. 판·검사가 법을 왜곡해 사건 당사자를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만든 경우 처벌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