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수도권 일대에 호우주의보가 내린 지난 20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빗소리를 압도하는 박수소리가 퍼졌다.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80세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조앙 피레스는 쇼팽의 녹턴과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로 관객들에게 ‘클래식의 미학’을 몸소 체험하게 했다.
이날 넉넉한 브이넥 니트에 면 소재의 긴 스커트를 입고 나타난 마리아 조앙 피레스. 특유의 종종 걸음으로 건반 앞으로 직진했다. 작은 손을 건반 위에 올려놓자마자 연주가 시작됐다. 관객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았든 가장 많이 들었을 쇼팽의 녹턴 6곡은 피레스의 손 끝에서 새롭게 다가왔다. 이날 피레스가 선택한 피아노는 이탈리아의 명품 피아노 ‘파지올리’ F 278이었다. 파지올리 특유의 옹골차면서도 밝은 톤의 음색에 적응하느라 처음에는 낯선 느낌을 받았지만 이윽고 쇼팽의 녹턴 작품번호 9-2번의 연주가 시작되면서 자연스러운 흐름에 빠져들었다. 계산에서 나오는 셈여림이 아니라 살아온 길, 품성, 평소 습관이 모두 하나의 자연스러운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피레스 측에서 애초에 준비한 프로그램은 드뷔시와 슈베르트였지만 공연 직전 쇼팽의 녹턴과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0번, 13번으로 바꾼 것으로 전해졌다. 피레스의 손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환영할 만한 변화였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0번과 13번은 무해하고 아름답다는 감정이 남았다.
인터미션 없이 진행된 피레스의 연주는 인생의 순리가 담겨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좋다’고 여실히 느끼는 순간 이미 눈 깜짝할 사이에 황혼에 다다른 인생처럼 연주는 끝을 맞이했다. 아쉬운 마음과 벅찬 마음을 담아 관객들은 끝없는 박수를 보냈다. 평소 리사이틀은 관객과의 에너지의 교류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그의 지론에 관객들이 완벽히 화답한 순간이었다. 지난 6월 임윤찬의 리사이틀을 뛰어 넘을 정도로 뜨거운 박수가 이어지자 연신 구도자의 자세로 감사의 인사를 표하던 그녀가 무대로 나와 다시 건반 앞에 앉았다.
앙코르 곡은 다시 쇼팽이었다. 첫 앙코르 곡은 쇼팽이 자신의 왈츠 중 가장 아름다운 왈츠로 꼽았던 ‘이별의 왈츠’였다. 두 번째 앙코르 곡은 ‘화려한 왈츠’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3개의 왈츠’ 2번이었다. 이 순간 만큼은 폭우 속 집에 돌아갈 길에 대한 걱정이나 한 주간 쌓인 번뇌들도 머릿속을 채우지 못했다. 지금까지 연주를 하고 있는 피레스에 경의를 보내는 동시에 이 연주를 보는 날이 다시 왔으면 한다는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