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수가 부진한 가운데 글로벌 경기가 둔화하면서 한국 경제의 성장세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올해 11월 미국 대선이 다가온 가운데 미중 갈등, 주요국 ‘피벗(통화정책 전환)’, 중동 확전 위험 등이 겹치면서 대외 요인의 불확실성도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저출생·고령화 등으로 우리 경제의 저성장이 고착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한국국제경제학회 회장인 원용걸 서울시립대 총장은 23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신성장 동력을 발굴하려면 창조적 파괴를 이끌 수 있는 ‘메기’ 기업들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며 “정부는 시장 환경이나 제도 정비를 통해 기업의 혁신 활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 원 총장은 윤석열 정부의 연금·노동·교육 등 3대 개혁과 규제 개혁이 지지부진한 데 대해 “보여주기 이벤트성 행사보다는 지속적인 개혁이 가능한 구조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며 “야당도 국가적인 의제를 놓고 정쟁을 만들기보다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경제가 수출 호조 등에 힘입어 회복 추세를 보이고 있는데.
△국내외 기관들의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2.4~2.5% 정도다. 지난해 1.4% 저성장에 따른 기저 효과에 불과하다고 본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올해 2분기 0.2% 감소하며 침체 징후를 보이고 있다. 반도체·자동차·정보통신기기 등 일부 품목의 수출 호조가 힘겹게 성장을 견인하고 있지만 장기간의 고금리로 인해 가계 소비와 기업 투자가 부진하다.
-향후 경기를 어떻게 전망하는가.
△크게 나아질 것으로 보지 않는다. 미국 경제가 둔화하면서 대미 수출에 부정적인 영향이 불가피하다. 또 미국이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하하는 ‘빅컷’을 단행했는데 원화 가치 상승으로 인해 수출 경쟁력 약화가 우려된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문제가 건설사·증권사·상호금융사 등 이미 드러난 부실 외에 추가적인 문제를 발생시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블랙스완(발생 가능성은 낮지만 일단 일어나면 엄청난 충격을 가져오는 위험)’이 존재한다면 하반기 경기 전망은 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미중 전략 경쟁에 따른 글로벌 무역 위축 위험, 중동 확전에 따른 에너지 가격 상승, 엔캐리 트레이드 추가 청산 등에 따른 금융시장 혼란도 우려되는 대외 리스크다.
-윤석열 정부 3년 차를 맞아 경제정책을 평가한다면.
△재정 건전화 기조를 유지하면서 원자력발전·방위산업 등 정부 지원이 필요한 분야들에 대해 세일즈 외교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점은 긍정적이다. 특히 반도체·인공지능(AI) 등 첨단학과의 수도권 정원을 늘린 것은 다른 정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파격적인 정책으로 보인다. 반면 가계부채 문제를 너무 안일하게 판단하고 대응책 마련에 실기했다고 본다. 건설 경기를 살려 부동산 PF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동산 가격 상승에도 미온적으로 대응했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내수 부양 등을 위해 확장적인 재정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빠른 정부 부채 증가 속도를 감안하면 재정 건전성 유지와 책임성 강화라는 기본 방향은 옳다고 본다. 그러나 경기가 부진하면 적자재정으로 재정지출을 늘리고 경기가 좋아지면 세수 확충을 통해 적자를 보전하는 것이 정부의 경기 안정 역할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정부가 지출을 늘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경제주체이다. 물론 과감한 재정지출 구조조정을 통해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고 취약 계층 지원 등 소득 창출 효과가 높은 곳에 재배분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정부의 감세 정책 추진이 건전 재정 기조와는 상반된다는 비판도 나온다.
△내수가 부진할 때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완화적 재정 정책이 재정지출 증대와 감세다. 세입이 충분하지 않을 때 재정지출을 늘리기 위해 국채를 발행하면 시장 이자율을 상승시킨다. 그러면 민간의 소비와 투자를 더 위축시킬 가능성이 있다. 반면 감세는 그런 부담 없이 가계의 가처분소득을 늘릴 수 있다. 필요한 감세는 시행하면서 세원을 확대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정부가 연금·노동·교육 등 3대 개혁과 규제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데.
△출범 초기에는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회를 대규모로 꾸릴 정도로 규제 개혁에 진심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전 정부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특히 비효율적인 가격 규제를 개혁하지 못한 점이 많이 아쉽다. 14년간 동결된 대학 등록금, 지난 정부부터 동결된 전기요금 등이 대표적이다. 3대 개혁 가운데 근로자의 노동시간 선택을 보장하려는 노동 개혁은 방향을 잃었고 교육개혁도 아쉬운 것은 마찬가지다. 그나마 가시적인 결과가 최근 정부가 마련해 국회에 제출한 국민연금 개혁안이다.
-개혁에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개혁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항상 고통스럽기 때문에 어느 정부도 이행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과 국민적 지지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좌고우면하거나 정치적인 유불리를 따지지 말고 국가 미래를 위해 가장 바람직한 방안을 마련하고 이해관계자들과 긴밀히 소통해야 한다. 특히 전문가들과 미리 충분히 논의하고 정책을 폈으면 좋겠다. 연구개발(R&D) 예산은 삭감됐다가 복구됐지만 ‘R&D 카르텔’ 운운하는 바람에 과학기술계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의대 정원 증원 문제도 시설·교수진 등 부족한 교육 역량을 감안하면 내년이 더 걱정된다.
-한국 경제가 저성장 고착화 위험에 빠졌다는 경고가 많다.
△어느 경제나 규모가 커지면 성장률 하락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이제는 성장 속도보다 내용, 양보다 질이 중요한 단계를 맞았다. 단기 성과에 집착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근본적인 구조 개혁에 나서야 한다. 무엇보다 투자의 주체인 기업을 지원하고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부 개입이 경제성장을 선도하기에는 경제 규모가 이미 너무 커졌다.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 방향이 바람직한가.
△첫째, 저출생·고령화에 대응해 경제활동인구를 늘려야 한다. 이를 위해 정년 연장, 노인·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확대, 교육 혁신이 필요하다. 둘째, 국내 기업의 투자는 물론 외국인 투자를 확대하는 정책들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기술 혁신과 R&D 촉진, 규제 완화, 연금·노동시장 개혁 등의 정책을 통해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유로존이 저성장에 빠진 반면 미국은 경제 규모가 큰데도 성장률이 더 높다.
△미국은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해 공격적으로 재정을 투입했다. 유럽은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재정 지원 규모가 작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에너지 수급에 큰 타격을 받았다. 근본적으로는 혁신 역량의 차이다. 미국은 지속적인 기술혁신과 풍부한 자본 시장, 노동시장 유연성과 고숙련 노동자 유치 등을 바탕으로 구글·아마존·메타와 같은 혁신적인 기업들을 지속적으로 배출하고 있다. 반면 유로존은 빠른 고령화에다 제조업·관광업 중심의 산업구조로 인해 성장 한계를 보이고 있다.
-미국 대선 이후의 대외 정책을 어떻게 전망하는가.
△민주당 대선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가운데 누가 당선되더라도 분야별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펼 것으로 예상된다. 조 바이든 행정부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반도체지원법이나 트럼프 전 행정부의 고율 관세 등은 결국 미국 내에서 고용하고 생산하라는 것이다. 미국 현지 투자를 확대해 관세 장벽을 극복하거나 보조금 혜택을 누려야 한다. 미국의 원산지 규정을 감안한 생산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등 제3국 생산과 우회 수출 전략을 고려해야 한다.
-트럼프가 재집권할 경우 정책 불확실성이 더 클 것으로 보이는데.
△‘알려진 리스크는 더 이상 리스크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트럼프가 처음 당선됐을 때에 비해서는 불확실성이 적고 어느 정도 대응 방법도 알고 있다. 트럼프는 관세 인상, 수입제한 등 더 전통적인 무역정책 수단을 강조하고 있다. 트럼프가 IRA 혜택을 폐지하거나 대폭 축소할 경우 세액공제와 보조금을 바라보고 미국 현지의 전기차 배터리 등에 투자한 우리 기업들이 피해를 볼 수 있지만 관세장벽은 우회할 수 있다. 또 감세 정책을 선호하는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소비·투자 등 민간 부문 활성화가 가능하다고 본다.
-미중 전략 경쟁과 경제 블록화 현상 등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핵심 광물 등 전략물자 수입선을 다변화하고 해외 생산 기지를 중국에서 동남아 등으로 이전해 미중 갈등을 회피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미국에는 한중 간 우호 관계가 동북아 지역 안정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잘 설득해야 한다. 중국은 여전히 그 규모나 역동성 측면에서 외면할 수 없는 경제 파트너이다. 디커플링(탈통조화)보다는 디리스킹(위험 경감)으로 한중 양국 관계를 유지하는 전략이 바람직하다. 무엇보다 반도체·2차전지 등 첨단전략산업에서 기술적 우위를 확보해 미중 모두에 필요한 존재로 인정받도록 해야 한다.
◆He is…
1963년 경기 수원 출생으로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 대학원 국제경제학과에서 경제학 석사,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 경제학부 교수를 거쳐 지난해 3월부터 서울시립대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금융중심지추진위원회 위원, 한국국제금융학회장 등을 지냈고 현재 국제개발협력위원회 민간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