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서방을 향해 핵 공격을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우크라이나가 미국·영국·프랑스 등 핵보유국의 지원을 받아 장거리 미사일로 러시아를 공격할 경우 이를 ‘공동 공격’으로 간주해 공격자 모두에게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핵 교리를 개정하겠다고 공식 선언한 것이다.
로이터통신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25일(현지 시간) 국가안보회의에서 “핵 억제 분야 정책이 현실에 맞게 조정돼야 한다”며 “핵무기 사용 조건을 다루는 교리 변경 작업이 진행돼왔고 군사적 위협에 관한 내용이 보강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비핵 국가가 핵보유국의 참여 또는 지원을 받아 러시아를 공격할 경우 러시아연방에 대한 공동 공격으로 간주된다”며 핵 교리 개정을 언급했다.
현재 러시아의 핵 교리는 핵무기로 무장한 적의 직접 공격이나 국가 존립을 위협하는 재래식무기 공격을 받을 때만 핵무기로 대응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교전 중인 우크라이나는 핵보유국이 아니므로 핵 교리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서방의 무기 지원을 받아 공격 수위를 높이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최근 미국의 패트리엇 미사일이나 영국의 스톰섀도 등 장거리 미사일로 러시아 본토를 공격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러시아가 차단에 나선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또 전투기와 순항미사일·드론 등을 활용해 공중 및 우주에서 러시아 국경 안으로 대규모 공격을 개시한다는 신뢰할 만한 정보를 받을 경우도 핵무기 사용이 고려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목할 점은 이번 발언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러시아 본토 타격에 서방의 미사일을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 직후 나왔다는 것이다. 미국은 군사적 효과가 크지 않은 가운데 갈등을 키울 수 있다며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고 영국·프랑스는 찬성, 독일은 반대하는 등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내에서도 입장이 갈리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날 푸틴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러시아가 더 이상 재래식무기로 우크라이나를 패배시킬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은 서방의 지원으로 우크라이나 침공 속도에 제동이 걸리고 전쟁이 계속되자 지난해부터 핵 위협 카드를 꺼내 들기 시작했다. 그는 지난해 2월 국정연설에서 미국과의 핵무기 통제 조약인 ‘뉴스타트’ 참여 중단을 선언했다. 이어 같은 해 6월 맹방 벨라루스에 전술핵무기를 배치하며 위협 수위를 끌어올렸다. 러시아가 해외에 핵무기를 배치하는 것은 해외 핵무기의 국내 이전이 완료된 1996년 이후 27년 만이다.
스웨덴 싱크탱크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 전 세계에서 사용 가능한(오래된 핵탄두 제외) 핵탄두는 9585기이며 이 중 러시아가 가장 많은 핵탄두(4380기)를 갖고 있다. 미국은 3708기로 러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핵탄두 보유국이다.
반면 푸틴의 발언이 아직까지는 위협적인 수준이 아니라는 해석도 나온다. 러시아 핵 전문가인 파벨 포드빅은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조성하려는 조치로, 서방에 일종의 경고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