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을 외쳐왔던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느닷없이 “통일하지 말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남북정상회담준비위원장까지 지낸 임 전 실장이 ‘급유턴’을 한 데에는 다분히 의도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가 입장을 180도 바꾼 배경을 따져보니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라는 대사가 불현듯 떠올랐다.
문재인 정부 주요 정책을 주도했던 임 전 실장은 이달 19일 9·19 평양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에서 “통일을 꼭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내려놓자”면서 “두 개의 국가를 수용하자”고 주장했다. ‘자주·평화 통일’을 목표로 내세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을 지낸 데 이어 5년 전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통일 운동에 매진하고 싶다”고 말했던 그가 어쩌다 ‘반통일 주동자’로 돌아섰을까.
그의 발언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두 국가론’과 닮은꼴이어서 더욱 충격을 준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12월 30일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남북한에 대해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고 규정한 뒤 “대한민국과는 언제 가도 통일이 성사될 수 없다”고 했다. 김 위원장의 ‘투 코리아(Two Korea)’ 선언을 임 전 실장이 따라 한 것으로 드러나자 여권에서는 “종북 공정(한동훈)” “종북 넘어 충북(忠北)(오세훈)” “북에 굴종(안철수)” 등의 비난이 쏟아졌다.
두 사람이 ‘두 국가론’의 깃발을 치켜든 이유는 무엇일까. 김정은 정권은 갈수록 커지는 남북의 국력 격차를 감당하지 못해 흡수통일될 가능성을 우려해 고육책으로 두 국가론을 꺼낸 것으로 보인다.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확산되는 한국에 대한 동경심을 차단하기 위해 ‘통일’ 꿈 지우기에 나선 것이다. 옛 동독의 ‘2민족 2국가’ 노선을 연상시키는 움직임이다. 동독은 한때 ‘2국가’를 넘어 ‘2민족’까지 주장하면서 통일에 소극적이었지만 결국 국력 차이로 서독에 흡수되고 말았다. 북한은 ‘두 국가’를 공식화하기 위해 다음 달 7일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을 개정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북한은 대한민국의 헌법 개정까지 노리고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말 ‘두 국가론’을 주장하면서 “대한민국 헌법에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조선반도(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버젓이 명기돼 있다”면서 우리 헌법 3조의 영토 조항을 콕 짚어 비난했다. 김 위원장은 또 “(남조선) 괴뢰정권이 10여 차례 바뀌었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의 통일 기조는 변함없이 그대로 이어져왔다”면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을 명시한 우리 헌법 4조를 겨냥했다. 그는 통일전선부 등 대남 사업 기구들을 정리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임 전 실장의 진짜 의도는 무엇일까. 바로 헌법 3·4조 개정 등을 위한 군불 때기다. 그는 이번에 두 국가론을 제기하면서 헌법의 영토 조항 개정과 국가보안법 폐지, 통일부 정리 등도 주장했다. 김 위원장 주장과 판박이라고 할 수 있다. 야권과 진보 진영의 일부 인사들은 그동안 사석에서 우리 영토를 규정한 헌법 3조를 개정하고 헌법 전문 및 4조에 규정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서 ‘자유’ 표현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일부에서 은밀하게 주장하던 내용을 임 전 실장이 과감하게 커밍아웃한 셈이다.
4·10 총선에서 범야권이 192석을 얻고 국민의힘은 개헌·탄핵 저지선에서 불과 8석이 많은 108석을 얻는 데 그쳤다. 만일 대통령 탄핵과 함께 개헌론이 본격 점화될 경우 야권과 진보 좌파 진영의 상당수 인사들은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등의 국제적 현실과 평화론을 내세우면서 대한민국 영토 조항 개정과 자유민주주의 삭제를 위한 바람몰이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여소야대 국면에서 야권의 개헌론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문재인 정부 당시 김정은 정권은 겉으로는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를 외치면서 북미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제로는 핵·미사일을 고도화하고 각종 도발을 감행했다. 문재인 정부를 주도했던 인사들은 북한 주장을 추종할 것이 아니라 집권 당시 북한의 기만 전술에 휘둘린 것을 반성해야 한다. 그런데도 임 전 실장은 25일 페이스북을 통해 “흡수통일을 추진하겠다는 인식 바탕에는 북한 붕괴론이 깔려 있다”며 ‘두 국가’를 고집했다. 헌법 가치를 부정하는 발언의 깊은 속내를 읽고 현명하게 대처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