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차기 총리가 될 집권 자민당 총재에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이 27일 선출됐다. “38년 정치 생활의 총결산”이라며 5번째 도전 끝에 이룬 당선이다. ‘당내 의원들에게 인기가 없다’고 알려진 이시바 당선인은 1차 투표에서 결선 경쟁자인 다카이치 사나에 경제안보담당상에 득표수로 뒤졌지만, 결선 투표에서는 예상을 깨고 의원 표와 도도부현 투표 모두 다카이치를 앞서며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시바 당선인은 이날 도쿄 자민당 본부에서 치러진 28대 총재 선거에서 결선까지 가는 접전 끝에 당의 새 리더 자리에 올랐다. 이날 진행된 1차 투표에서 이시바는 154표(의원 46, 당원·당우 108표)로 181표로 1위를 차지한 다카이치(의원 72, 당원·당우 109표)와 결선에 올랐다. ‘3강’ 후보로 평가된 고이즈미 신지로 전 환경상은 136표에 그쳐 1차 투표에서 낙선했다. 이날 투표는 1차에서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아 상위 2명이 결선을 치렀다. 다시 진행된 2차 투표에서 반전이 펼쳐졌다. 국회의원 유효표 362표 중 189명, 47개 도도부현 중 26곳이 이시바를 선택하면서 최종 215대 194(다카이치, 의원 173·도도부현 21표)의 역전승이 연출된 것이다. 새 총재는 내달 1일 열리는 임시국회에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 후임으로 일본의 제102대 총리로 선출될 예정이다.
◆변화 위해 ‘쓴소리 언더독’ 택한 자민=이시바 당선인은 무계파·비주류 인사로 ‘쓴 소리꾼’ 이미지라 당내 인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줄곧 당내 파벌 정치의 문제점을 지적해 왔고, 2016년부터는 각료나 당직을 받지 않고 아베 신조 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을 꾸준히 내왔다. 2020년 당내 절대 권력이던 아베 당시 총리에 대해 ‘코로나 19 부실 대응’ 문제를 거론하며 “이대로면 자민당이 끝장난다”고 공개 비판하기도 했다. 2008년부터 이번 선거 전까지 네 차례 총재 선거에 출마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신 것을 두고도 “유권자한테 인정받아도 당에서 인기가 없어서 안 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실제로 2012년 자민당이 야당이던 2012년 총재 선거에서는 가장 많은 당원 표를 얻었지만, 결선에서 아베 전 총리에게 패했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도 “결선에 가면 이시바의 승리 가능성은 낮다”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이 같은 전망을 뒤집은 것은 최근 비자금 스캔들로 흔들린 당을 쇄신하고자 하는 당내 위기감이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시바는 자민당 파벌에 의한 정치자금 스캔들과 관련해 “정치자금 문제의 대상이 된 정치인이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며 당 전체가 함께 설명을 다 해야 한다고 책임을 강조해왔다. 반면 결선에 함께 진출한 다카이치 사나에 경제안보담당상의 경우 선거 출마를 위해 필요한 20인의 추천인 중 상당수가 이번 스캔들에 연루된 인사였다는 점에서 의원들의 부담이 컸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다카이치가 극우의 강경 보수를 표방한다는 점 역시 일부의 거부감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요미우리신문은 “‘총리가 되어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다’고 선언하는 등 다카이치의 일련의 우파 색이 강한 언동에 외교 면에서 악영향이 나올 수 있다는 지적도 일부 반영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경제 재생·신뢰 회복 등 과제 산적=차기 총리가 받아든 숙제는 만만치 않다. 30년 가까이 지속된 디플레이션 탈출과 경제 재생은 가장 시급한 과제다. 새 총리는 물가와 임금의 동반 상승이라는 ‘선순환’을 이어가면서도 실질적인 경제 성장을 이뤄내야 한다. 최근 일본은 물가 상승률이 2%를 넘어섰고, 올해 봄 노사 교섭에서 33년 만에 높은 임금 인상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은 여전히 부진하다는 평가다. 여기에 최근 미국의 경기 둔화 우려가 커지면서 당초 연내 예상했던 일본 정부의 ‘디플레이션 탈출 선언’도 미뤄지는 분위기다. 이에 이시바는 주요 공약으로 지방 중시 정책과 경제 활성화를 내걸었다. 그는 “지방의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내겠다”며 지방창생을 경제정책의 축으로 설정했다. 지방 고용 창출과 소득 향상이 일본 성장력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통해 전국적인 경제 발전을 도모하겠다는 구상이다.
◆선거 결과에 금융시장 출렁=한편, 이날 금융시장은 선거 결과에 따라 출렁였다. 외환시장은 1차 투표와 결선 투표 결과 발표 직후 정반대의 방향으로 요동치는 모습을 보였다. 이날 1차 투표 직후 이시바·다카이치의 결선행이 발표되자 엔·달러 환율은 한때 146엔까지 치솟으며 엔화 약세(환율 상승)를 보였다.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을 공개 반대해온 다카이치의 당선 가능성에 엔화 매도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결선에서 엔저에 따른 물가상승을 지적해 온 이시바의 당선이 확정되자 엔화 가치는 다시 달러당 142엔대로 ‘강세’ 전환했다. 이시바 당선인이 금융소득 증세 의향을 밝힌 것과 관련해 야간 선물 시장이 급락하기도 했다. 이날 저녁 오사카 거래소의 야간 거래에서 닛케이 평균 선물은 12월물이 한때 2000엔 이상 하락했다. USB SuMi 트러스트의 아오키 다이주 최고투자책임자는 “주식시장에는 부정적인 재료”라며 “해외 투자자들의 일본 주식에 대한 관심이 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법인세 인상에 대한 경계도 남아 있다는 분석이다. 이시바 당선인은 선거 중 “법인세를 올릴 여지가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일본 기업의 세 부담이 커지면 수익을 압박해 주당이익(EPS)에 하락 압력이 가해진다.
◆첫 평가·시험대는 중의원 선거=차기 총리는 이 같은 복합적인 과제들을 해결하면서도 자민당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국민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정치자금 스캔들로 지지율 하락과 선거 연패를 경험한 자민당은 파벌 해체, 기시다 총리의 ‘총재 선거 불출마’ 같은 처방으로도 당 지지율을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신뢰 및 지지율 회복에 대한 첫 평가는 이르면 연내 예상되는 중의원 선거가 될 전망이다. 일본 정치권에선 새 총재 취임과 함께 10월 중 조기 중의원 해산 및 총선 가능성이 점쳐진다.
한편,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은 지난 23일 노다 요시히코 전 총리를 새 대표로 선출했다. 노다 신임 대표는 “자민당과의 싸움은 바로 오늘부터 시작됐다”며 강한 정권 교체 의지를 표명한 상태다. 현재 여론조사 결과만 놓고 보면 자민당에 비해 야당의 지지율은 매우 낮은 상황이다. 요미우리신문의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자민당 지지율이 31%로 가장 높았고, 입헌민주당(5%), 일본유신회(3%), 공명당·공산당(각 2%) 순으로 나타났다. 자민당 지지율이 오랜 기간 정체돼 있긴 하지만, 다른 야당의 지지율이 여전히 한 자릿수에 머물러 있다. 다만, 자민당 파벌에 의한 정치자금 스캔들 이후 치러진 주요 선거에서 야당이 잇따라 자민당을 누르고 선거에서 승리한 상황이라 중의원 선거에서 ‘반전 시나리오’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풍운아’, ‘비주류’ 이시바가 당내 개혁 과정에서 당권을 제대로 장악할 수 있느냐도 핵심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일 역사 문제 ‘온건’ 입장이지만=이시바 당선인은 한일 역사 문제에 있어서는 우익 세력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 왔다. 그는 2019년 8월 한국 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 결정 이후 자신의 블로그에 독일의 전후 반성을 언급하며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당시 그는 “우리나라(일본)가 패전 후 전쟁 책임을 정면에서 직시하지 않았던 것이 많은 문제의 근원에 있다”며 “이런 상황이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표면화돼 있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일본에도 한국에도 ‘이대로 좋을 리가 없다. 뭔가 해결해서 과거의 오부치 총리-김대중 대통령 시대 같은 좋은 관계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2018년 11월에는 와세다대 강연 중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역사를 인식해야 한다”며 한국 대법원의 강제 징용 판결 대응 때 이런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번 선거 ‘3강’이었던 다카이치, 고이즈미 신지로 전 환경상과 달리 그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해 오지도 않았다. 큰 틀에선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이어 온 한일 관계가 유지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지만, 갈등의 불씨는 있다. 최근 한일 관계와 관련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던 데다 방위상 출신으로 자위권 강화를 강조하면서 자위대 헌법 명기 등 군사력 증강 의지를 표명하고 있어 한일 간 새로운 마찰 가능성도 있다.
이 밖에 미·일 지위 협정 재검토, 아시아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창설 제안, 영공 침범 등을 둘러싼 대(對) 중국 정책 등 외교 부문에서도 넘어야 할 벽이 높다는 분석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시바 당선인은 선거 기간 독자적인 외교·안보 정책을 내세웠지만, 실현을 위해서는 동맹국인 미국과의 협력이 필수적”이라며 “아시아판 NATO 구상에 대해 미국 내에서도 실현 가능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언론들은 이 밖에 이시바가 내건 정당법 제정, 선거 제도 개혁, 부부별성 법제화 등이 정권으로서 체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들어 ‘쉽지 않은 과제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