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동통신사들이 신사업 확장을 위해 필요한 네트워크 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램 인터페이스(API) 개발을 위해 동맹 구축에 나섰다. 인공지능(AI) 기술 발전으로 인해 새로운 IT 서비스가 급증하는 가운데 개발사들이 통신망과 데이터를 활용해 쉽게 솔루션·서비스를 개발하도록 맞춤 개발도구를 만들어주는 것은 물론 최대 경쟁자인 빅테크에 맞서 공동전선을 꾸리겠다는 것이다.
29일 통신업계에 따르면 전 세계 주요 12개 통신사와 통신장비업체 에릭슨은 네트워크 API 사업을 위한 합작법인을 내년 초에 설립하기로 했다. 독일 도이치텔레콤, 미국 3대 통신사인 티모바일·AT&T·버라이즌, 스페인 텔레포니카, 싱가포르 싱텔, 영국 보다폰, 프랑스 오랑주, 인도 릴라이언스지오 등이 참여했다. 통신사들이 합작지분 지분 50%, 에릭슨이 나머지 50%를 갖고 관련 협력을 진행한다.
SK텔레콤·KT·LG유플러스 등 국내 통신 3사도 지난달 말 네트워크 API 사업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고 규격 표준화와 상용화 등에 힘을 모으기로 했다. 세계이동통신사업자연합회(GSMA)는 지난해부터 ‘네트워크 오픈게이트웨이 API’라는 유사한 협력 사업을 시작해 23개국 45개의 통신사를 유치했다. KT는 지난달 국내 최초로 네트워크 API로 GSMA 인증을 받으며 동맹 참여를 추진 중이다.
API는 개발자들이 쉽게 쓸 수 있도록 가공해 제공하는 개발도구로, 네트워크 API는 통신망과 가입자 등 관련 데이터를 활용해 만든 통신사 특화 API다. SK텔레콤의 ‘지오비전’처럼 기지국의 유동인구 데이터를 활용해 유통업계를 위한 상권 분석 서비스 개발을 지원하거나 통신 사입자 전화번호를 기반으로 금융기관의 본인인증 절차를 간소화하는 ‘번호 검증’ 같은 네트워크 API가 대표적이다. 그외 업무나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다양한 API가 만들어질 수 있다.
맥킨지는 향후 5~7년 간 전 세계 통신사들이 네트워크 API 사업을 통해 1000억~3000억 달러(132조~400조 원)의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연간 수십조 원의 시장 규모다. 통신사들은 지금처럼 무·유선 요금제와 직접 개발한 서비스·솔루션을 판매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기업간거래(B2B) 사업을 개척하겠다는 공통된 구상을 가졌다.
이 같은 사업이 비교적 최근에서야 본격적으로 추진된 배경에는 업계의 이해관계 변화가 있다. 통신사들이 네트워크 API 경쟁력을 키우려면 서로 협력해야 하지만 그동안은 경쟁관계라는 인식이 강해 실현에는 한계가 있었다. 가령 한 통신사가 유동인구 분석 API를 출시할 때 전체 인구가 아닌 자사 가입자 점유율만큼의 데이터만 활용할 수 있고 이는 API의 품질에 영향을 미친다. 고도화하려면 다른 통신사들과 협력해야 하는데 이 경우 경쟁사가 무임승차할 우려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경쟁사 입장에서도 사업적 판단에 따라 협력 필요성이 크지 않고, 개발자 입장에서는 한 통신사의 API를 도입해도 다른 통신사 가입자에게는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통신사들이 각개약진하는 동안 구글·네이버·카카오 등 빅테크들이 지도 서비스를 통해 기지국과 별개의 유동인구 데이터 확보를 통해 API 공급자로 부상하자 통신사들도 부랴부랴 협력을 추진하고 대응에 나섰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통신사들도 플랫폼 기업과 경쟁해야 하는 시대가 되면서 통신망을 플랫폼화해서 개방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며 “특히 여러 국가에서 경쟁 중인 다국적 통신사들을 중심으로 글로벌 차원의 협력이 강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IT 서비스 수요가 급증하면서 빅테크에 맞선 통신업계의 공동전선도 확대되는 양상이다. SK텔레콤과 도이치텔레콤·소프트뱅크 등 5개사는 AI 합작법인을 만들고 통신 특화 대형언어모델(LLM)을 공동 구축 중이며 이보다 앞서 카카오톡 같은 메신저 앱에 대항해 전 세계 표준 문자 서비스인 차세대메시지서비스(RCS)도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