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중 반도체 제재가 지속되는 가운데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인도행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탈중국을 고민하는 기업들의 인도 투자가 본격화하는 상황에서 인도 정부가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각종 지원책을 빠르게 확대한 영향이다. 다만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 등 국내 반도체 기업은 생산시설 진출에 대해선 망설이는 분위기다. 중국 생산시설 운영 여부에 대한 고민과 전력·용수 등 현지 인프라 부재가 이유로 꼽힌다.
2일 외신과 업계에 따르면 일본 반도체 장비기업 도쿄일렉트론은 최근 인도 타타일렉트로닉스가 짓고 있는 반도체 공장에 장비를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타타일렉트로닉스는 현재 대만 3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 PSMC와 합작해 110억 달러(약 14조 7000억 원)를 들여 구자라트주 돌레라에 2026년 양산을 목표로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다. 아삼주 모리가온에도 비슷한 시기 가동 계획으로 반도체 공장을 건설 중이다.
도쿄일렉트론은 이 시점에 맞춰 장비 설치를 위해 일본에서 엔지니어를 파견하는 것에 더해 현지 장비도입과 애프터서비스 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교육시설을 포함하는 지원 시스템도 만들기로 했다.
미국 마이크론도 지난해부터 27억 달러를 들여 인도 구자라트에 반도체 패키징 공장을 짓고 있다. 인도에 들어서는 첫 글로벌 반도체 공장으로 올해 말 가동될 예정이다. 네덜란드 차량용 반도체 NXP도 최근 10억 달러를 투자해 인도에 연구개발(R&D) 시설을 확대하고 반도체 설계인력도 2배 이상 늘리기로 했다. 인도 CG파워도 일본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 태국 스타스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와 함께 10억 달러를 투자해 구자라트주에 전력 반도체 생산 공장을 짓는 등 굵직한 투자가 이어지고 있다.
최근 인도에서는 반도체 행사인 세미콘 인디아도 처음으로 개최됐다. 이 행사에는 AMAT, 램리서치 등 세계적 장비 업체들의 임원들이 연사로 총출동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으로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줄어든 중국의 빈자리가 인도로 대체되는 양상이다.
반도체 업계에선 현지 반도체 제조역량을 확보하기 위해 천문학적 보조금을 앞세운 인도의 정책이 성과를 거뒀다고 보고 있다. 인도 정부는 현지에 반도체 생산시설을 설립하면 비용을 최대 50%까지 지원하거나 향후 5년에 걸쳐 매출액 증가분의 4~6%를 인센티브로 지원하는 생산연계인센티브(PLI)를 시행하고 있다. 인도에 공장을 지으면 해당 비용의 절반을 보조금으로 지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14억 명에 이르는 거대 내수시장과 풍부한 정보기술(IT) 인력도 강점이다. 인도는 반도체 주요 수요처인 스마트폰의 글로벌 2위 생산거점이다. KOTRA에 따르면 인도의 반도체 시장규모는 올해 77억 달러에서 2029년 133억 달러까지 5년 만에 2배 가까이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은 연구개발(R&D) 위주로 인도 투자를 확대하되 생산시설 투자에 대해선 미온적인 분위기다. 삼성전자 반도체 인도법인(SSIR)은 올초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R&D 조직을 신설하고 두 번째 반도체 R&D 센터를 개설했다. 생산시설 부분에선 반도체 장비·기판 기업인 심텍이 지난달 마이크론 생산거점 인근 공장 설립을 위해 주정부와 양해각서를 체결한 정도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인도에 생산시설을 짓게 된다면 용수와 도로, 전력 문제 등 인프라가 미흡해 일정 기간 진통이 불가피하다”며 “중국 공장도 제한된 범위 내에선 증설을 지속하고 있어 국외 생산시설을 위한 추가투자가 부담인 면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업체들이 주력으로 생산하는 고사양 반도체에 대한 시장이 인도에서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점도 투자를 망설이게 하는 요인이다. 현재 인도에 투자가 결정된 반도체 생산시설의 주력 생산공정은 28㎚(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