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만 존재하던 '고분자 합성기술' 세계 첫 구현…2차전지 등 활용 기대[이달의 과학기술인상]

■박문정 포항공대 화학과 교수
사슬 말단부로 구조체 변화 제어
블록공중합체 나노구조 분야 개척
업계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이달의 과학기술인상’ 10월 수상자인 박문정(사진) 포항공대 화학과 교수는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블록공중합체(BCP) 나노 구조체를 세계 최초로 구현했다. 쉽게 말해 자이로이드·다이아몬드 등에 풀리지 않았던 BCP 구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같은 연구 업적을 두고 과학계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외부 변수의 변화로 물질의 상이 바뀌는 고분자 상전이도를 재정립했을 뿐 아니라 교과서를 새로 쓸 만큼의 독보적인 연구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를 기반으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하고 한국연구재단과 서울경제신문이 공동 주관하는 ‘이달의 과학기술인상’ 10월 수상자에 선정됐다.


BCP는 분자 단위의 단량체 블록이 다른 단량체의 블록과 연결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고분자다. BCP는 ㎚(나노미터) 구조체를 형성할 수 있어 반도체와 의료 분야에도 활용되고 있지만 구조가 복잡해질수록 열역학 안정성이 떨어져 제작이 어려웠다. 더구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BCP를 구성하는 고분자 메인 사슬에만 집중했다. 고분자에서 말단부 비중은 1%도 채 되지 않아 학계는 분자구조식 작성을 할 때 말단부를 생략하는 것을 허용할 만큼 가볍게 여겼다.


반면 박 교수 연구팀은 말단부에 주목했다. 사슬 말단부를 치환하는 과정에서 나노 구조체 변화를 제어할 수 있었고 서로 다른 분자를 각각 연결한 이중 말단 BCP를 제작할 수 있었다. 그 결과 BCP 사슬 내 말단부가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겨 고분자 꼬리들이 모두 내부로 모여들었고 연구팀은 세계 최초로 ‘배관공의 악몽’ 구조를 실제로 구현했다. 배관공의 악몽 구조는 다른 나노 구조체와 차별화된 광학적·기계적 특성을 가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실제로는 구현이 어려워 불가능의 영역으로 치부됐다. 이를 박 교수팀이 실현시키자 ‘상상과 이론’에서만 존재하던 BCP 구조를 현실에서 선보이는 데 성공했다고 과학계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이번 연구는 BCP 고분자 조성과 메인 사슬의 화학적 성질 등을 다양하게 조절했음에도 말단부의 강한 인력이 존재하는 경우 복잡한 구조가 안정적으로 구현된다는 점을 도출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는 평가다. 이는 추후 다양한 복합 구조 고분자 나노 구조체 개발 연구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졌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어서다. 이 같은 고분자 구조체에 범용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리튬 2차전지, 수소연료전지, 수전해 등 에너지 시스템을 비롯해 액추에이터, 증강현실(AR)·가상현실(VR)과 같은 웨어러블 기기에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를 키우고 있다. 박 교수는 “이번 실험 결과로 100㎚ 미만 크기의 반복 주기를 갖는 복잡한 구조를 밝히려는 도전이 계속될 수 있게 됐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박 교수의 연구 성과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1월호에 게재됐다. 알리신 네도마 영국 셰필드대 화공생물공학 전공 교수는 사이언스 논평을 통해 “새로운 BCP 나노 구조체 설계를 위한 기반을 제공했다”며 “원하는 특성의 나노 구조체를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어 공정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박 교수는 “교과서에 없던 주제에 빠져 한 우물을 판 것이 성과를 냈다”며 “앞으로 전고체 전지 등 에너지 소재로 쓰이는 전하 수송 고분자 설계와 합성 분야의 국제적 입지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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