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수공예 장인들과 컬래버…인내가 만든 '그림같은 자수'

국제갤러리 '유령 그리고 지도'展
도안 일부 그려내 브로커에 전달
오랜 기다림 끝에 협업작품 완성

함경아 작가. 사진제공=국제갤러리


코로나19 팬데믹은 미술 등 예술가들에게도 절망을 안겨줬다. 많은 사람들은 예술을 ‘혼자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많은 작가들은 타인과 교류하며 자신의 예술에 철학을 더하고 작품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지난 2008년부터 시작된 작가 함경아의 ‘자수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함 작가의 작업 방식은 독특하다. 그는 우선 자신이 디자인한 자수 작품의 도안을 일정 부분만 제작해 브로커를 통해 북한의 수공예 장인들에게 전달한다. 북한 노동자들은 작품의 나머지 부분을 작가가 제안한 디자인에 따라 제작해 다시 남으로 보낸다. 작가는 돌아온 작품을 손질해 캔버스에 엮어 완성한다.


따라서 작품 완성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 요인은 남북 관계다. 작품이 북으로 넘어가면 작가는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작품 제작 과정도, 마감 기한도 정할 수 없다. 그저 말 없이 짧게는 2년, 길게는 4년의 시간을 기다릴 뿐이다.


함경아의 이 같은 인내와 기다림의 여정을 만나볼 수 있는 전시 ‘유령 그리고 지도’가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함경아의 ‘시 03WBXS01’.사진제공=국제갤러리


K1 전시장에서는 먼저 작가가 불확실함으로 가득한 시간을 기다린 끝에 돌려 받은 자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사랑에 빠졌다(we fell in love)’는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선거 유세장에서 자신의 외교 성과를 자랑하며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과 ‘사랑에 빠졌다’고 표현한 일화를 떠올리며 제작한 작품이다. 작품에는 완성된 해가 아닌 제작하는 데 걸렸을 것으로 예상되는 노동 시간이 적혀 있다. 숫자는 익명의 다수와 협업해 완성한 작품을 세상에 알리고 각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북한 노동자에게 ‘발주’하는 제작 방식이 국제법적으로 문제는 없을까. 이 역시 남북 관계가 결정하겠지만, 전시를 진행한 국제갤러리 측은 “10년 넘게 작품을 제작하면서 그 부분이 문제된 일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자수 프로젝트’는 팬데믹 이후 사실상 멈춰 있는 상태다. 작가는 ‘유령’과 같은 불특정 다수와 함께한 예술 활동이 멈춘 지금 작업을 중단하기보다는, 진짜를 찾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작가는 ‘자수 프로젝트’가 북한에 새로운 예술 세계를 열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터넷 세계에서는 북한의 진짜 모습을 만나볼 수 없다. 어쩌면 없는 세계를 있는 것처럼 만들어낸 경우도 많다.


작가가 이같은 특수한 시대적 상황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작품은 K3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마치 컴퓨터 프로그래밍 화면 속 패턴처럼 리본테이프를 가로·세로로 직조해 완성된 작품들은 인터넷 세계와 진짜 세상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함경아의 ‘시01WBL01V1T’. 사진제공=국제갤러리


국제갤러리 한옥 공간에서는 팬데믹 기간에 작가가 느낀 우울함과 절망감을 표현한 태피스트리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태피스트리는 실과 섬유를 꿰어내 그린 회화다. 작가는 통상 단절된 남북 관계를 객관적으로 보여줄 뿐 자신의 감정을 작품에 녹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데, 이번 태피스트리 작품은 단절 이후 느껴진 우울함과 절망감 등을 ‘눈물’ 처럼 표현해 눈길을 끈다. 전시는 11월 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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