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 갖는 문자의 우수성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글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으로 인류의 위대한 지적 유산이다(영국 문화학자 존 맨)” “한글보다 뛰어난 문자는 없다(미국 언어학자 로버트 램지)” 등 세계적인 학자들이 입을 모아 한글의 우수성을 예찬하지만 정작 우리 사회에서 한글은 국적 불명의 신조어·은어 홍수에 밀려나곤 한다. 이에 문화체육관광부는 올해 한글 주간(10월 4~10일) 주제를 ‘괜찮아?! 한글’로 선정하기도 했다.
578돌 한글날을 맞아 고교 시절부터 48년 동안 한글 운동에 매진한 김슬옹(61) 세종한글문화원장을 만나 한글날의 의미를 되새겨봤다. 그는 한글 관련 저술 111권(공동 저술 70권 포함)을 펴내고 1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한 국어학자로 2015년 훈민정음해례본을 소장하고 있는 간송미술관과 교보문고의 지원으로 해례본의 복간본을 처음 제작했다.
김 원장은 500여 년 전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정신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명은 지식을 통해 발달하고 지식은 문자로 쌓입니다. 문명의 진화에서 중요한 게 말과 글의 일치(언문일치)예요. 한글에는 보편주의·평등주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언어가 있었지만 신분과 계층에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지식과 정보를 접하라는 취지를 담은 문자는 한글이 유일합니다. 더구나 한글처럼 새 문자의 사용 설명서를 책(훈민정음해례본)으로 남긴 문자도 없습니다.”
“훈민정음해례본은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이 직접 창제 이유와 원리, 사용법을 설명한 세계 유일의 문자 해설서로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이에요. 한글날을 10월 9일로 정한 것도 1940년 간송 전형필 선생이 경북 안동에서 훈민정음을 발견하면서 한글 반포 시기를 정확하게 알게 돼서죠.”
한글 지킴이 48년 외길을 걸어온 계기를 물어봤다. “국립철도고를 다녔어요.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신문을 배달했죠. 남는 신문을 보니 어려운 한자가 많아 뜻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릴 때 한학자인 부친으로부터 천자문을 배웠는데도 말이죠. 그때부터 한글학회 산하 전국국어운동고등학생연합회에 가입하면서 한글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가 외솔 최현배 선생의 정신이 깃든 연세대 국문과로 진학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1983년에는 재판을 통해 이름 ‘용성’을 순우리말 ‘슬옹’으로 바꿨다. 슬기롭고 옹골차다는 의미다. 그는 “법적 개명은 성년이 된 대학 2학년 때 했지만 고교 1학년 때 김슬옹이라는 명찰을 달고 다녀 선생님한테 엄청 혼났다”고 회상했다. 대학 시절 ‘서클’을 우리말 ‘동아리’로 바꾼 주역이기도 하다.
그는 “한글 예찬은 국수주의나 흔히 말하는 ‘국뽕’ 차원이 아니다”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한글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 문자이기 때문이다. 유네스코가 문맹 퇴치에 공헌한 사람과 기관에 해마다 주는 상의 이름에 세종대왕(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을 붙인 까닭이다. “한글의 진정한 가치는 나눔과 이음에 있어요. 지식을 나눠주고 정보를 이어주고, 사람을 이어주지요. 결국 지식과 정보를 쉽게 나눌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말과 글의 바른 사용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외국어와 외래어를 구분해야 합니다. 외래어는 ‘컴퓨터’라는 말처럼 우리말로 자리 잡아 외래어를 쓰지 말자는 것은 국수주의로 비칠 수 있죠. 한자어도 외래어의 일종입니다. 삼가야 할 것은 외국어 또는 외국어와 한국어의 혼용이죠.” 예컨대 ‘힙하다’ ‘핫하다’라는 말은 국적 불명의 잡탕 말로 국어 파괴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는 개명까지 했지만 순우리말만 고집하지는 않는다. “한때 순우리말 운동이 크게 번졌습니다. 신문을 포함한 출판물에서 한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죠. 순우리말 운동은 한글이 차별을 받아왔기에 이를 극복하자는 차원이었습니다.” 그는 이어 “한자어든 순우리말이든 소통에 문제가 없으면 가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은어와 신조어, 줄임말 사용에 대해서는 “말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라며 “또래 집단끼리 사용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서로 소통하는 데 장애가 발생하기 때문에 삼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또 “출판물에서 한자가 거의 사라지고 한글 전용이 정착된 것에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소통을 쉽게 하고 모두를 배려하는 게 세종의 한글 창제 정신입니다. 세종 정신은 디지털 시대에 더 빛을 발합니다. 0과 1의 조합인 디지털은 한글 자모의 결합과 유사합니다. 우리나라가 디지털 강국이 된 것도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마차가 다니던 500여 년 전 한글 창제는 흡사 자동차의 탄생과 같습니다.”
김 원장은 “한글이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하고 있기에 이제는 전 세계에 한글을 나눠야 하고 한글날을 기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2043년 한글 창제 600주년을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2043년이면 한글 창제 600주년입니다. 우리만의 행사에 그칠 게 아니라 한글의 보편적 가치에 공감하는 세계인이 참여하는 국제적 행사로 한글날을 기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