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와 야구 발상지 '인천' [인천톡톡]

1901년 강화도 근대 축구팀 존재 기록 전해져
1927년 한국 최초 한인야구단 '한용단'도 인천

1882년 인천항에 상륙한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호의 허스킨 함장이 인천부사에게 보낸 공문. 자료제공=국사편찬위원회


프로축구와 프로야구가 시즌 막바지를 향하고 있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최근 1부 리그 파이널 라운드 일정을 확정해 발표했다. 프로야구 역시 한국시리즈를 향한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있다. 이들 종목은 우리나라 최고의 인기스포츠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축구와 야구가 인천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인천은 개항의 도시로 수많은 문물이 도입된 곳이다. 그중 축구와 야구도 인천에서 시작됐음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영국을 모태로 하는 근대 축구가 한국에 전파된 것은 1882년(고종 19)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Flying Fish)호가 제물포에 입항했을 때 수병들이 잠시 상륙해 자기들끼리 축구 시합을 벌인 게 한국 땅에서의 최초의 축구 경기로 알려진다.


이날 축구 경기에 사용했던 공을 우리나라 어린이들에게 주고 갔는데 이 공이 한국에 전해진 최초의 축구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플라잉 피시호 허스킨 함장이 인천부사에게 보낸 공문에서 엿볼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 근대 축구가 정식 보급된 1904년 보다 앞선 1901년 강화도에 근대 축구팀이 존재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1901년 3월 21일 시드니 J. 파커가 제물포에서 영국 성공회 발행 잡지 ‘모닝 컴(Morning Calm)’편집자에게 보낸 편지에는 강화학당 축구팀이 G.A. 브라이들 목사에게 수년간 훈련을 받았으며, 선수들의 기량도 좋다고 쓰여 있다. 인천이 우리나라 축구 도입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이다.




1927년 한국 최초 한인야구단 ‘한용단’ 야구팀. 사진제공=인천시


야구 역시 인천이 국내 야구의 시발지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야구의 기원은 1904년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Philip. L. Gilet)가 야구 장비를 들여와 황성기독청년회(YMCA의 전신) 회원들에게 타구(打球) 또는 격구(擊球)라는 이름으로 야구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통설이다.


하지만 인천고등학교의 전신인 인천영어야학회(1895~1904)에 재학했던 후지야마 후지후사의 1899년 2월 3일 자 일기에 “베이스볼이란 서양공치기를 시작하고 5시경에 돌아와서 목욕탕에 갔다”는 내용이 있다. 이 당시에 인천에 이미 야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다. 이는 미국인 선교사가 보급한 1904년보다 무려 5년이나 앞선다. 이를 근거로 인천의 야구 역사가 120년을 훌쩍 넘는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일본에서는 1872년 가이세이학교(동경대학 전신)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호레이스 윌슨이 “학교운동장에서 학생들에게 내가 때린 공을 잡게 했다”는 내용을 근거로 일본 야구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이 또한 인천 개항과 더불어 일본 야구가 인천에 이미 보급됐을 개연성이 큰 대목이다.


그리고 1927년 한국 최초 한인야구단 '한용단'도 인천이다. 한용단은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를 주축으로 조직된 야구팀이다. 한용단과 일본팀이 겨루는 한·일 대항전은 많은 관중이 모였다고 전해진다.


다만 한국 야구 도입원년을 정의하기 위한 학계의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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