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산업 정책을 입안했던 역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들이 우리 반도체 산업에 대해 경고의 목소리를 냈다. 지금은 우리 반도체가 메모리를 중심으로 세계 1위를 수성하고 있지만 앞으로 언제든지 상장폐지된 일본 도시바나 분사 위기에 처한 미국 인텔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반도체 산업이 인공지능(AI) 산업으로 전환하는 변곡점을 맞이한 상황에서 정부가 보다 과감한 지원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경제인협회는 14일 서울 영등포구 FKI타워에서 역대 산업부 장관들을 초청해 ‘반도체 패권 탈환을 위한 한국의 과제’라는 주제로 특별 대담회를 열었다. 대담회에는 이윤호 전 지식경제부 장관, 윤상직·성윤모·이창양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이종호 전 과학기술통신부 장관 등이 참석했다.
전직 장관들은 반도체 산업이 중대한 전환기에 있다며 경쟁국의 수준을 뛰어넘는 전향적인 정책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를 보였다. 이윤호 전 장관은 “지금 비(非)메모리는 물론 메모리 경쟁력도 담보하지 못할 만큼 아슬아슬한 반도체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며 “경쟁국들이 대포를 쏘는데 우리는 탱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미국·중국·일본·대만·유럽연합(EU) 등 전 세계 각국이 반도체 부문에 막대한 지원금을 투입하는데 우리는 대기업 특혜라는 틀에 갇혀 시작조차 못하고 있어 경쟁에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창양 전 장관도 “PC 시대와 모바일 시대를 거쳐 AI 시대로 진입하면서 반도체 산업의 제품 수요와 기술 변화, 그리고 기업의 경쟁력 판도가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기업이 경쟁력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효과적인 정책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밝혔다.
전직 장관들은 특히 기업에 대한 직접 보조금 지급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현재 국내의 반도체 산업 지원은 세금 감면(세액 공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경쟁국들은 직접 현금을 주는 방식으로 경쟁력 쇄신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미국은 68조 원, 중국은 101조 원, EU는 62조 원 규모의 직접 보조금 재원을 마련한 상황이다. 이른바 ‘대만 칩스법’을 통해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는 대만의 경우 TSMC를 내세워 서버용 AI 가속기, AI 기능이 탑재된 최신 모바일용 프로세서 위탁 생산을 독식하며 삼성전자와의 격차를 벌리고 있다. 대만은 이를 기반으로 2022년부터 1인당 국민총생산(GDP)에서 한국을 20년 만에 다시 앞질렀다.
정부 재정이 부족해 보조금을 주지 못한다는 논리에 대해서도 반박이 나왔다. 한경협에 따르면 정부가 예산을 편성하고도 쓰지 못하는 일명 불용예산은 연평균 11조 원에 이른다. 정부가 예산을 체계적으로 편성한다면 재정 부담을 늘리지 않고도 보조금을 지급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어 반도체 산업의 기반인 전력 인프라 준비 상황이 우려스럽다는 목소리도 함께 나왔다. 윤 전 장관은 “반도체 산업은 전력을 많이 필요로 하고 특히 AI 반도체 시대가 되면서 전력 인프라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며 “2030년까지 추가로 필요한 전력수요가 64GW에 달하는데 이는 120GW인 우리나라의 현재 전력 설비를 50% 이상 늘려야 하는 천문학적 규모”라고 지적했다. 전력수급에 대한 준비가 지연되면 첨단산업 발전도 늦어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이창양 전 장관도 “에너지 문제는 산업 강국의 랭킹을 바꾸는 문제”라며 “국회에서 초당적으로 의견을 모아 송전선로 설치 특별법, 고준위방사성폐기물 특별법 등을 처리해야 하는 등 법적인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전직 고위 관료들은 다만 이번 전환의 시기에 잘 대응하면 향후 더 큰 기회가 올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무엇보다 인재 육성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종호 전 장관은 “우리나라가 약한 시스템반도체에서 가장 중요한 게 인재인데 정부 지원이 그동안 부족했던 측면이 있다”며 “다른 나라 정책을 벤치마킹하는 것도 좋지만 이제는 경쟁국에서 하지 않는 우리만의 전략을 갖고 데이터 기반으로 탄력적인 정책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