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현 삼성전자 부회장이 '반도체 반성문'을 쓴 이후 첫 공식 행보로 반도체 공급망 점검을 택했다. 세계적인 반도체 장비 회사와 끈끈하게 협력해 반도체 기술 경쟁력을 회복하고 업계에서 잃어버린 '초격차'의 지위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17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전 부회장은 도쿄일렉트론(TEL) 코리아의 새로운 연구개발(R&D) 센터인 'TCCK-2' 개소식에 참석했다. 이날 행사에는 전 부회장과 함께 송재혁 최고기술책임자(CTO), 남석우 글로벌 제조&인프라총괄 제조담당 사장, 박진영 구매팀장 등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의 수뇌부가 참석했다. DS부문장은 물론 반도체 제조·R&D·구매 부문을 책임지는 주요 인물들이 총출동한 셈이다.
전 부회장은 TEL 일본 본사 최고경영자(CEO)인 카와이 토시키 CEO와 만나 환담을 나누고 R&D 센터 준공을 축하했다. 송 CTO는 축사를 통해 "삼성은 앞으로 TEL사와 새로운 반도체 기술과 제품을 개발하고 시장을 함께 선도해 나가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전 부회장의 이번 일정은 '반도체 반성문'을 낸 이후 첫 공식 행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는 8일 삼성전자 3분기 잠정실적 공개 직후 본인 명의로 메시지를 내고 시장의 기대에 못 미친 성과에 대해 "송구하다"고 발표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의 수장이 자사의 기술 부진에 대해 대중에게 사과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 부회장의 반성문은 실제 삼성 반도체가 마주하고 있는 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메모리 반도체 업계에서 압도적인 1위, 대만 TSMC를 따라갈 수 있는 유일한 대항마로 꼽혔던 삼성전자는 최근 라이벌 회사들에 기술 우위를 빼앗기거나 쫓기고 있다. 인공지능(AI) 메모리의 상징이 된 고대역폭메모리(HBM)의 경우 SK하이닉스가 현존 최신 제품인 5세대 HBM(HBM3E) 양산에서 삼성전자를 앞섰고 단일 D램에서조차 10나노급 6세대(1c) D램을 먼저 개발하면서 우위를 점했다. 파운드리의 경우 2019년부터 '2030년 시스템 반도체 1위' 자리를 노리고 있지만 잇따른 수율 부진·고객사 확보 문제로 TSMC 추격이 요원한 상황이다.
회사의 메모리·파운드리 사업 부진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수율'이다. 수율은 칩 제조 과정에서 양품의 비율을 뜻한다. 현재 10나노급 6세대 D램과 3나노(㎚·10억 분의 1m) 파운드리 등에서 양품의 비율이 낮아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많다.
삼성전자의 수율 문제는 공급망과도 큰 연관이 있다. 삼성의 주요 반도체 공장 안에는 수만 가지의 장비·부품이 적용돼 있기 때문이다. 자체 기술을 보완하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반도체 공급망 파트너와 긴밀한 협력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필수다. TEL은 글로벌 4대 반도체 장비사로 삼성전자의 반도체 라인에도 다양한 장비가 설치돼 있다. 전 부회장은 TEL과의 끈끈한 협력으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신설 연구소를 직접 찾아 파트너사 임직원들을 격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TEL 역시 미래 반도체 개발을 위한 밀착 지원을 약속했다. TEL코리아의 새로운 R&D센터는 삼성 화성 사업장 바로 옆에 건립됐다. 지하 2층·지상 8층으로 지어진 R&D 연구소는 1200평 규모의 반도체 장비 클린룸을 확보했다. 기존에 한국에 있던 R&D센터인 TCCK를 합쳐 600여 명의 인력이 근무한다.
TEL은 10나노급 7세대 D램(N+4) 이후에 필요한 삼성전자의 맞춤형 장비까지 개발한다. 특히 최근 TEL이 업계를 주름잡고 있는 극저온·펄스드 DC 식각 장비 개발이 적극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이 기술들은 초고용량 낸드플래시·D램 제조를 위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