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중국·인도 등 비(非)서방 신흥경제국 연합체인 브릭스(BRCIS)가 미국 중심의 서방 질서에 대응한 협력 방안을 공동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세계 최대 밀 수출국인 러시아가 제안한 브릭스 곡물거래소 창설도 추진하기로 했다. 곡물거래소는 향후 원유·가스·금속 등 상품을 거래하는 시장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다만 당초 골격을 내놓을 것으로 관측됐던 브릭스 결제 시스템 구축 등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이뤄지지 않아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균열이 노출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러시아 타스통신과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브릭스 국가의 정상들은 23일(현지 시간) 러시아 타타르스탄공화국 카잔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 공동의 협력 방안을 담은 ‘카잔 선언’을 채택했다. ‘다극주의’를 강조한 이번 선언에는 브릭스 국가 간 새로운 투자 플랫폼과 곡물거래소 창설 계획 지지, 회원국 간 금융 분야 협력 강화 등의 내용이 담겼다.
이번 브릭스 정상회의는 러시아가 전 세계에 반서방 연대의 힘을 과시하는 동시에 서방이 지배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형성할 수 있는 잠재력을 드러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카잔 선언 채택에도 불구하고 브릭스는 패권 경쟁 중인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방법이지, 어느 편을 들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중국 싱크탱크 중국과세계화센터(CCG)의 헨리 후이야오 왕 회장은 “각국은 브릭스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찾고 있다”며 “이것이 바로 브릭스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카잔 선언 역시 수위가 신중하게 조절됐다는 분석이다. 이번 정상회담의 핵심 주제인 브릭스 단일 통화와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되지 않았다는 게 단적인 예다. ‘브릭스 브리지(BRICS Bridge)’로 알려진 브릭스 단일 통화는 러시아 중심으로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와 유사한 글로벌 결제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담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방의 제재로 스위프트에서 퇴출되면서 국제 결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이번 회담은 미국이 북한군의 파병을 공식 확인한 가운데 이뤄졌다는 점에서 비상한 주목을 끌었다. NYT는 북한군 러시아 파병에 대해 중국과 북한의 75년 외교 관계를 전례 없는 시험대에 올려놓았다고 평가했다. 중국은 미국과 동맹국들이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반서방에 맞서는 세계 질서를 둘러싼 광범위한 대립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