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만에 정권 교체에 성공한 영국 노동당이 연간 400억 파운드(약 72조 원)의 대규모 증세에 나선다. 30년 만에 최대 규모다. 세금 인상은 대부분 기업과 부유층을 대상으로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당국은 늘어난 세수를 바탕으로 공공재정의 안정을 꾀하는 한편 공공 서비스를 재건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았지만 과도한 증세로 기업 활동이 위축돼 성장이 정체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30일(현지 시간) 레이철 리브스 재무장관은 의회에서 연 400억 파운드 증세와 5년간 1000억 파운드(약 180조 원)의 공공지출을 골자로 한 새 정부의 첫 예산을 발표하며 “공공재정의 안정을 복구하고 공공 서비스를 재건하겠다”고 밝혔다. 올 7월 총선에서 압승하며 출범한 노동당 정부는 ‘220억 파운드의 재정 블랙홀’을 해결하는 동시에 ‘진료 대기만 2년’이라는 비판을 받는 국민보건서비스(NHS) 등 공공 서비스를 개선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리브스 장관은 “경제성장을 이끌 유일한 길은 투자, 투자, 투자”라며 공공투자를 위한 세금 인상을 선택했다. 이번 증세로 영국의 조세부담률은 2028년께 역대 최고 수준인 국내총생산(GDP)의 38.2%까지 치솟을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조세부담률은 36.4%다.
다만 증세는 기업과 고소득자에게 집중돼 있다. 인상안에 따르면 정부는 내년 4월부터 소득세 격인 국민보험(NI)에 대한 기업 부담금을 15%(1.2%포인트 인상)로 높이고 지급 기준을 낮춰 연 250억 파운드(약 45조 원)의 세수를 확보할 방침이다. 최저임금은 6.7% 인상된다. 양도소득세 격인 자본이득세(CGT)를 고소득자의 경우 최대 24%까지 높인다. 추가 지출을 위한 대규모 차입 계획도 밝혔다. 이를 통해 NHS 등 국가 보건 서비스에 2년간 226억 파운드, 내년도 교육 예산에 67억 파운드, 국방 예산으로 30억 파운드 등을 증액한다는 방침이다.
영국 정부가 갑자기 대대적인 증세안을 발표한 것은 누적된 재정적자로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리즈 트러스 전 영국 총리는 세수 부족에 대한 대안이 없이 감세 정책을 내놓았었는데 이에 따라 파운드화 가치가 급락했고 국채 이자가 치솟았다. 트러스 전 총리는 취임 후 44일 만에 사임했다.
경제계에서는 기업에 비용을 전가해 결과적으로 성장이 정체될 것이라는 우려를 내놓는다. 영국상공회의소는 “고용주의 국민보험 부담금 인상은 경영상 비용 부담을 줄 것”이라고 꼬집었고 레스토랑 업계를 대표하는 UK호스피털리티도 “고용 비용의 쓰나미에 휩싸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재무부 산하 독립 재정 분석 기구인 예산책임청(OBR)은 증세가 물가를 높이고 가계 소비 및 생활 수준에 타격을 줘 성장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OBR은 앞서 2028년 영국의 GDP 성장률을 1.7%로 예측했지만 예산안 발표 이후 1.5%로 0.2%포인트 낮췄다. 시장은 예민하게 반응해 영국 10년물 국채금리는 5개월 만에 최고치인 장중 4.4%까지 올랐다. 일각에서는 증세를 꺼리는 국민이 늘어나면 취임 3개월 만에 지지율이 큰 폭으로 추락한 키어 스타머 총리의 정치적 입지가 흔들릴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