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숙하고 근엄한 미술관에 선술집에서나 볼 수 있는 진갈색 식탁과 의자가 마련됐다. 모처럼 미술관을 찾은 관람객들은 이 의자에 앉아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눈다. 지나가던 행인들도 전시를 보다 지친 다리를 두드리고자 잠시 의자에 앉는다.
이곳은 국내 1세대 실험미술 작가 이강소(81)의 대규모 개인전 ‘풍래수면시(風來水面時)’가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서울박스’다. 식탁과 의자는 1973년 작가가 서울 명동화랑에서 열었던 첫 개인전 ‘소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당시 작가는 실제 선술집에서 이용하던 낡은 탁자와 의자를 가져와 관람객에게 막걸리를 파는 파격적 전시로 유명세를 탔다.
작가는 포장마차에서 지인에게 식사를 대접하던 중 이와 같은 전시 기획을 떠올렸다. 서로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상대방 만을 볼 수 있고, 자기 자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작가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자신과 상대방이 속한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소멸’은 현실은 신뢰할 수 없고,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작가의 예술 인생을 관통하는 커다란 주제가 반영된 대표작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예술 인생을 반영하는 100여 점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작품이 제작된 시기는 물론, 조각, 설치, 판화, 영상, 사진, 회화 등 활용한 매체로 다채롭지만 모든 작품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다르지 않다. 작가는 “작가가 무엇을 제작해 보여주든 사람의 마음과 생각 경험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주제의식을 일관되게 표출한다.
전시장 도입부에는 작가가 1978년 선보인 비디오 작업 ‘페인팅 78-1’이 설치됐다. 당시 작가는 카메라 앞에 유리를 세워 두고 유리를 붓으로 색칠하는 자신의 모습을 촬영한다. 유리에 색이 채워질수록 카메라 영상 속에서는 작가의 모습이 사라진다. ‘페인팅 78-1’은 예술은 작가가 아닌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는 주제 의식을 ‘나를 지우는 작업’을 통해 소개하는 작품이다.
이강소를 아는 이라면 가장 먼저 떠올릴 ‘오리’나 ‘사슴’ 등 구상회화도 만나볼 수 있다. 작가는 1980년대부터 캔버스에 집이나 배(船), 오리, 사슴 등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회화 역시 구상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작품 속 오리와 사슴 등 도상은 보는 위치, 보는 이의 기분에 따라 다른 개념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이강소는 “내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오리가 살아있다는 흔적 같은 것”이라며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오리가 될 수도, 병아리가 될 수도, 닭이 될 수도 있는 것"이라며 작품을 설명했다.
여든이 넘어선 나이지만 이강소는 최근 오스트리아계 유명 화랑인 타데우스로팍과 전속 계약을 체결하며 제2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작가는 “(나는) 이제 상당히 낡은 세대가 됐고 앞으로 넘어질 일이 많을 것”이라면서도 “이번 전시를 계기로 한국의 현대미술 작가로서 좀 더 튼튼하게 남은 시간을 국제적으로 교류하면서 열심히 작업하겠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4월 13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