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위기 타개를 위해 3분기에 역대 최대인 8조 8700억 원의 연구개발(R&D)비를 투입하는 등 기술력 제고에 사활을 걸고 있지만 ‘주 52시간 근무’와 같은 낡은 규제에 발목이 잡혀 R&D 역량을 마음껏 키우지 못하고 있다. 대만 TSMC, 미국 엔비디아 등 글로벌 경쟁 기업의 엔지니어들이 24시간 사무실 불을 밝히고 첨단 기술 개발에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으나 우리 전략산업의 연구 인력들은 근무시간 규제 때문에 저녁에 퇴근하기 바쁜 실정이다. 삼성은 약 20조 원을 투입하는 기흥 반도체 R&D단지 건설을 추진하고 있지만 불 꺼진 연구소에서 초격차 기술력 확보와 생산성 제고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반도체 기업에서 근무시간 규제가 치명적인 것은 R&D 효율을 높이는 데 집중 근무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한창 연구와 토론에 몰입하다가도 정해진 퇴근 시간을 지키느라 맥이 끊기면 기술 개발에 속도를 내기 어렵다. 미국과 일본 등이 R&D 인재를 비롯한 고소득 전문직에 대해서는 근로시간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 ‘화이트칼라 면제 제도’를 시행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고급 인재들이 마음껏 일하고 높은 보상을 받는 시스템을 갖춰야 국가 경쟁력의 근간이 되는 첨단 기술력을 확보할 수 있다. 가뜩이나 인재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주 52시간 일괄 적용이라는 경직된 노동법의 틀에 갇힌 우리 기업들은 양적·질적으로 R&D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그러니 우리의 차세대 반도체 기술 수준이 미국은 물론 유럽·일본에도 뒤처진다는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의 분석이 나오는 것이다.
이대로 가면 치열한 반도체, 인공지능(AI) 경쟁에서 한국이 도태될 수밖에 없다. 인적·물적 자원 총공세를 펴는 경쟁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면 ‘주 52시간 근무’와 같은 시대착오적 족쇄를 기업들에 채워서는 안 된다. 여야는 우선 첨단전략산업의 연구 인력 등에 대한 근로시간 규제 면제 조항을 추가한 ‘반도체 특별법’을 조속히 입법화해야 할 것이다. 전반적인 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한 근로시간 규제 개선과 임금체계 개편 등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한 노동 개혁에도 속도를 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