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찍었냐구요? 저는 미치지 않았어요.” 미국 대선 투표가 시작된 5일(현지 시간) 오전 7시 버지니아 프로비던스 선거구 투표소가 차려진 옥턴고에서 한 표를 행사한 아시아계 여성 커리나 씨는 자신을 ‘해리스 지지자’라 밝히면서 이같이 답했다. 그는 “많은 걱정들이 있지만 해리스는 잘할 것”이라면서 “그녀가 부통령으로 있을 때 그녀의 권한은 많지 않았고 그의 의무는 조 바이든을 보조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보여줄 새로운 리더십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버지니아 대선 투표가 오전 6시부터 시작된 가운데 이른 아침부터 투표소를 찾는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워싱턴DC에 인접한 버지니아는 전통적으로 민주당 세가 강한 곳이지만 이번 선거의 접전을 반영하듯 트럼프 지지자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라틴계인 마르코스 씨는 기자에게 자신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재임 당시 민주당원이었다고 소개하면서 “갈수록 가난해지는 미국인의 삶에 지쳤기 때문에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힘줘 말했다. 그는 “나는 항공사라는 좋은 직업을 갖고 있는데도 아이 3명을 키우기에 물가는 너무 높고 경제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서 “민주당에서 자꾸 ‘페이지를 넘기자’고 얘기하는데 제발 좋은 경제로 페이지 좀 넘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한 백인 남성은 “워싱턴DC 백악관 앞에 감옥처럼 펜스가 들어선 것을 봤냐”고 반문하면서 “민주당이 트럼프를 분열로 묘사하는데 정작 공화당원들을 모두 인종주의자, 폭력주의자로 대하는 것은 민주당원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트럼프는 생각보다 합리적인 인물”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가 미시간주에서 가진 마지막 유세에서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을 향해 쏟아낸 여성 비하적 욕설에 대한 반감에 투표에 나섰다는 유권자도 만날 수 있었다. 50대 백인 여성인 에이미 에드워드는 “트럼프는 펠로시를 향해 ‘사악하고 역겨운 미친X(crazy bi--)’라는 욕설을 퍼부었다”며 “그의 여성 비하적 태도는 모든 미국인 여성을 향한 것이며 ‘아니다(No)’라고 말하기 위해 투표장에 나왔다”고 말했다.
투표를 하루 앞두고 미국 전역에서 만난 시민들도 각자 투표할 후보를 마음 속에 정했지만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공통적으로 보였다. 뉴저지주 듀몬트에 거주하는 중년의 백인 여성은 “트럼프는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하기 때문에 해리스를 지지한다”며 “선거 결과는 예측할 수 없지만 해리스가 승리하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반면 뉴저지의 한 시민은 “이민 문제에 대한 공화당의 시각에 완전히 공감한다”고 말했다. 2016년 대선 당시 트럼프의 승리를 예측했던 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연대 대표는 “이번 선거는 설문 조사 결과부터 해서 바닥 민심까지 예측이 어려울 정도로 유례없는 박빙의 승부”라며 “결과가 윤곽이 나올 때까지 일주일 이상 걸릴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미 역사상 유례없는 접전이 펼쳐진 대선을 앞두고 수도인 워싱턴DC 주요 시설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관저가 있는 해군 천문대,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거주지인 플로리다 팜비치 등을 중심으로 보안이 대폭 강화됐다.
수도인 워싱턴DC 백악관 등 주요 시설 주변에서는 높이가 2m 정도 되는 검은색 보안 펜스가 설치되고 백악관 근처 펜실베이니아 애비뉴에 있는 사무실과 주요 상권 앞에는 입구 주변으로 대형 나무 합판벽이 들어섰다. 근처를 지나가던 시민은 “정치적으로 어디에 속해 있든지 두렵고 답답한 상황”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미국 사회의 극심한 정치 양극화를 고려하면 승패 결정 이후 대규모 폭동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021년 ‘1·6 의회 폭동’을 주도했던 극우단체 ‘프라우드 보이스(PB·Proud Boys)’가 지역별로 재결집하고 있으며 선거 이후 폭력적인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해리스가 대선 당일 밤 모교인 하워드대에서 개표 상황을 지켜볼 것이라 예고한 가운데 경찰은 대학 주변 도로를 통제하고 주차를 금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건물주들과 사업체들도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민간 경비를 강화하는 한편 창문이나 입구 보안을 강화해 혹시 모를 약탈이나 폭동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전했다.
워싱턴DC 담당 경찰은 대선 기간 3300명의 경찰 병력이 12시간씩 2교대 근무를 하며 수도를 철통같이 지킬 방침이라고 밝혔다. 파멜라 스미스 경찰청장은 “우리는 선거기간 어떤 폭력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선에 막강한 영향을 미칠 경합주에서도 개표 시설 관리에 비상이 걸린 분위기가 역력했다. 4년 전 대선 직후에도 트럼프의 선동으로 ‘도둑질을 멈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개표소를 위협하는 극성 지지자들이 목격됐던 만큼 이번 선거에서는 미국 전역의 수백 개 선거 사무실에 방탄유리와 강철 문 등이 설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