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중견 완성차 회사인 르노코리아와 KG모빌리티가 자동차 운반선을 구하지 못해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세계 최대 자동차 수출국으로 올라선 중국이 세계 각지로 차를 실어 나르기 위해 운반선을 싹쓸이하면서 바닷길이 막혀 버린 것이다. 급한 대로 컨테이너선을 활용했지만 평소보다 6~7배 치솟은 운임에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수출을 해야만 했다.
자동차 운반선 품귀 현상은 해운 산업의 중요성을 재부각시킨 사건이라는 평가가 많다. ‘무역의 젖줄’인 해운업이 흔들리면 경제 전체가 멈출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한진해운 파산에 따른 교훈을 잃어버린 셈이다.
SK해운 같은 주요 해운사가 매물로 나오면서 업계 재편이 빨라지고 있지만 국내 해운업을 어떻게 발전시킬지에 대한 밑그림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1위 컨테이너 선사인 HMM은 매각 작업이 실패로 돌아간 뒤 사실상 정부의 우산 아래 있고 사모펀드(PEF) 운용사가 소유한 해운사들은 매각 작업이 꼬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국내 해운업의 중장기 경쟁력 강화를 위한 해외 터미널 확보와 중장기 투자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어 주무 부처인 해양수산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해운 정책이 보이지 않은 대표적인 분야가 해운사 간 인수합병(M&A)이다. 산업은행과 한국해양진흥공사가 대주주인 HMM은 올 초 2월 하림그룹과의 매각 협상이 최종 결렬되고 향후 처리 방향이 미궁에 빠졌다. 현재 두 기관의 합산 지분율은 67.05%다. 내년 만기가 돌아오는 7200억 원 규모의 영구채를 주식으로 전환하면 두 기관의 지분율은 71.69%까지 치솟는다. HMM의 시가총액을 고려하면 두 기관의 지분 가치는 10조 원을 넘는다. 국내 유일한 국적 컨테이너사로 국내 대기업 가운데 인수자를 찾아야 하지만 몸집이 너무 크다. 지분 일부만 매각하는 방안도 검토될 수 있지만 인수 이후 정보의 입김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력이 떨어진다.
해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책금융기관 관리에 들어간 기업은 업황이 회복되면 바로 시장에 돌려주는 것이 맞다”며 “이럴 때 중요한 게 정부의 강력한 의지다. 해수부가 어떤 생각과 매각 로드맵을 가졌는지 알려진 게 없다”고 비판했다. 강도형 해수부 장관이 “HMM 매각을 안 하는 게 아니”라고 밝힌 바 있지만 윤석열 정부 임기가 반환점을 맞은 데다 최근에는 국정동력도 떨어져 이번 정부에서는 매각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투자은행(IB) 업계의 시각이다. 업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옛 대우조선해양을 보면 왜 매각을 서둘러야 하는지 알 수 있다”며 “대우조선이 한화그룹에 인수된 후 본원의 경쟁력을 되찾고 있다”고 전했다.
HMM뿐만이 아니다. 현재 사모 운용사가 최대주주로 있는 해운사는 SK해운(한앤코)·현대LNG해운(IMM컨소시엄)·에이치라인해운(한앤코) 등이 있다. 폴라리스쉬핑도 대주주가 따로 있지만 차입금이 많아 사실상 증권사(메리츠증권)의 관할 아래 있다. 이중 매물로 나온 SK해운의 경우 몸값만 4조 원이 거론된다. 자금을 좀 더 동원하면 HMM으로 방향을 틀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시장에서는 매각이 쉽지 않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해운 업계의 한 관계자는 “프라이빗에쿼티(PE)의 특성상 시점이 문제지 언젠가는 수익을 회수하고 나가야 한다”며 “해운사들의 몸값이 수조 원에 달하는 상황이라 해양진흥공사를 재무적투자자(FI)로 쓸지, 전체적인 해운 업계의 그림을 어떻게 그릴지 그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주요 해운사 매각 대상에 국내 대기업을 배제하지 말고 전체적인 산업 발전의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무역국가인 한국은 해운산업의 중요성이 절대적이다. 수출입 물동량의 99%가 해상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원유와 가스, 철광석 같은 핵심 천연자원은 100% 바닷길에 의존한다. 한종길 성결대 유통물류학부 교수는 “해운사들은 핵심 물자를 수송하고 있다”며 “경제안보 차원에서 한국가스공사나 포스코와 같은 화주가 해외 매각 시 해당 선사와 계약하지 않는 방식으로 안전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