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장 담긴 손 글씨의 힘, 공무원 사기 올리죠"

■역대 다섯 번째 필경사 유기원 주무관
5급이상 임명장 하루 30장꼴 작성
'대통령 마음' 대신 전하는 데 보람
서예가로 '손 글씨' 알리려 공직 도전
'노량' 등 영화·드라마 글씨도 대필
인쇄가 대체 못할 필경사 늘었으면


필경사(筆耕士). 손 글씨로 글을 적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나 전문가를 뜻한다. 조선시대 왕이 내리는 교지를 썼던 필경사는 ‘사자관(寫字官)’이라고 불렸고 명필 한석봉이 오랫동안 맡았던 관직이기도 하다.


인쇄술이 발달한 지금도 필경사는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2명의 필경사가 인사혁신처에 근무 중이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5급 이상 고위공무원 임명장을 손으로 쓰는 업무를 하는 국가공무원이며 우리나라 공무원 중 가장 희귀한 직군이라고 할 수 있다.


7월 역대 다섯 번째 필경사로 임용된 유기원 주무관은 6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컴퓨터로 출력한 글씨는 마음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 것 같다”며 “정성을 담아 마음을 전하는 것이 손 글씨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1962년 필경사가 처음 생긴 후 62년 동안 필경사 업무를 했던 공무원은 유 주무관을 포함해 5명이다. 현재는 유 주무관 외 김동훈 주무관 1명이 더 있다.


대전대 서예학과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유 주무관은 필경사가 되기 전 서예 작가였다. 그동안 여러 차례 전시회도 열었으며 ‘노량’ ‘경성크리처’ ‘재벌집 막내아들’ 등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하는 글씨를 대필하기도 했다. 서예 작가가 되기 전에는 직업군인이었다. 그는 6년간 육군에 복무하다 대위로 전역했다.


56대1의 경쟁률을 뚫고 임용된 그가 필경사가 되기로 한 것은 서예가와 필경사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서라고 한다. 유 주무관은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직업인 필경사에 도전한 이유 중 하나는 필경사는 곧 서예가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라며 “또 요즘처럼 손 글씨를 안 쓰는 시대에 서예가는 몇 안 되는 손 글씨를 쓰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리기 위해 필경사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그가 이 직군을 택한 또 다른 이유는 대통령의 마음을 담아내고 공무원의 사기 진작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어서라고 했다. 유 주무관은 “대통령의 마음이 담긴 글을 종이에 써서 해당 승진자에게 전달하는 데 보람을 느낀다”며 “임명장을 대통령 대신 내가 전달한다고 보면 ‘마음의 전달자’라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유기원 주무관이 자신이 쓴 임명장 예시를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제공=인사혁신처

임명장을 쓰는 과정은 단순히 붓을 놀리는 게 아니다. 잉크는 시중에 파는 제품이 아닌 직접 먹을 갈아 쓴다. 손으로 만든 먹물을 써야 임명장의 글씨가 오래 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종이는 특수 제작된 한지다.


하루 평균 30장 정도의 임명장을 쓴다는 유 주무관이 임용 후 지금까지 작성한 임명장은 수백 장이다. 한 장의 임명장을 쓰는 데는 평균 2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임명장 용지에 내용을 다 쓴 후 행정안전부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글자가 찍힌 국새를 날인받으면 임명장이 완성된다.


유 주무관은 “어떤 이들은 ‘요즘 인쇄 기술이 얼마나 좋은데 굳이 왜 임명장을 손으로 쓰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하는데 손 글씨의 의미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라며 “필경사는 없어서는 안 될 공무원 직군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앞으로 필경사가 지금보다 더 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고 전했다. 그는 또 “처음 임명장을 썼을 때 대통령이 내 오른손을 잡고 쓴 느낌 또는 내가 대통령의 손을 잡고 쓴 느낌으로 모든 정성을 기울였다”며 “초심을 잃지 않고 매번 임명장을 쓸 때 한 글자 한 글자 신중을 다해 붓을 움직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기원 주무관이 서울경제신문 독자들을 위해 쓴 글을 들어보이고 있다. 김정욱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