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투자 업계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재집권 확정 직후 미국 주식형 상장지수펀드(ETF)가 사상 처음으로 최대 거래 대금을 기록한 것을 두고 한미 증시에 대한 국내 투자자의 기대가 크게 엇갈린 결과로 해석했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이 상·하원까지 모두 휩쓸자 트럼프 당선인의 자국 우선주의 정책 추진력이 강력해지면서 미국 기업들의 실적과 주가를 한꺼번에 끌어올릴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이에 반해 국내 상장기업의 경우 체질 개선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상황에서 관세 증가, 보조금 축소 등의 조치에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는 시각이 확산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8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7일 KRX100, KRX300지수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은 각각 0.96배, 0.94배를 기록했다. 연초만 해도 1배를 넘었던 PBR이 급속도로 하락했다. PBR은 주가를 장부 가치로 나눈 값으로 1배 미만이면 회사가 보유 자산을 전부 매각하고 청산하는 것보다도 현 주가가 싸다는 점을 뜻한다. 연초부터 정부가 추진한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프로그램의 약발도 먹히지 않은 셈이다. 이날 코스피지수도 전일 대비 3.48포인트(0.14%) 내린 2561.15에 거래를 마쳤다. 8거래일 연속 2500 선에 머무는 상태다. 이와 달리 뉴욕 증시는 6~7일(현지 시간) 연일 사상 최고치를 갈아 치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외국인투자가는 계속해서 한국 증시를 떠나는 가운데 이제 개인투자자까지 우리 시장을 등지는 모양새다. 외국인은 이날도 유가증권시장에서 173억 원어치를 팔았다. 상반기 22조 4227억 원을 쓸어 담은 외국인은 하반기에 들자 약 14조 원 가까이를 순매도하며 지수를 끌어내리고 있다. 개인도 마찬가지로 7~8일 코스피시장에서만 3451억 원어치를 팔아 치웠다.
미래에셋자산운용 관계자는 “하루 만에 주식형 패시브 ETF가 5000억 원 가까이 거래된 건 유례없는 일”이라며 “대선 이후 미국 주식형 상품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증시 전문가들은 트럼프 당선인의 승리로 원·달러 환율이 치솟고 있다는 점도 한국 증시에는 악재로 꼽았다. 외국인이 환차손을 피하기 위해 보유 물량을 적극적으로 팔아 치울 수 있어서다. 전문가들은 나아가 트럼프 당선인의 정책 기조인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재정 확장 정책이 필수라고 입을 모았다. 이는 국채금리 급등(국채 가격 하락), 달러 가치 상승으로 이어지는 조치다.
트럼프 당선인의 정책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자극해 현 금리 인하 기조를 되돌릴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전문가들은 수출 비중이 높은 국내 기업들에는 환율 상승이 호재일 수 있지만 그 효과가 관세 인상을 상쇄할 정도인지는 알 수 없다고 분석했다. 오히려 그동안 조 바이든 정부에서 강조한 각종 친환경 정책의 보조금 혜택이 사라지면서 국내 반도체나 2차전지 기업들에는 부정적인 영향이 더 클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도 나왔다.
전문가들은 상황이 이런데도 국내 증시는 반등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 더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삼성전자(005930)를 비롯한 상장사들의 실적 전망이 계속해서 하향되는 가운데 트럼프 내각의 정책 기조에 따라 수출 중심인 한국 산업계가 더욱 큰 피해를 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업계 일각에서는 증시 부양을 위해서는 상장사들이 주주 환원 정책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박희찬 미래에셋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한국이 미국의 공격적 관세 인상에 따라 수출 제한을 받는 대표적인 국가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며 “트럼프 당선인이 자국 우선주의 정책 기조를 천명한 만큼 미국 증시 쏠림이 더욱 커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31일 거래소 주관의 밸류업 ETF 간담회에 참석한 한 금융투자 회사 대표는 “애플이 지금의 시가총액을 기록할 수 있던 배경에는 엄청난 실적 성장뿐 아니라 적극적인 자사주 소각도 있다”며 “국내 상장기업들이 주주 환원을 통해 주가를 부양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