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손에는 두툼한 노트가 들려 있었다. 힘들거나 괴로울 때 그리고 기쁠 때도 그 마음을 차곡차곡 담았던 바로 그 노트다.
시즌 최종전 SK텔레콤·SK쉴더스 챔피언십을 며칠 앞두고 윤이나를 만나 지난 1년을 보내면서 느낀 소회와 앞으로 진로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질문에는 시간을 지체하면서 선뜻 대답하지 못했고 어떤 질문에는 ‘일기 노트’를 뒤적이면서 답하기도 했다.
진부하지만 가장 먼저 올해 자신에게 어떤 점수를 주고 싶으냐고 물었다. 한참을 생각한 윤이나는 “만점을 주고 싶다”고 했다. 그 만점은 분명 ‘기쁜 만점’이라는 의미였지만 기자에게는 왠지 ‘슬픈 만점’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건 아마도 윤이나 자신은 기쁘고 설레게 보낸 ‘감사의 1년’이었겠지만 그래도 심적으로 무척 힘든 시간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에 도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나눈 대화를 소개한다.
-올해 자신에게 점수를 준다면?
▶저는 거의 만점 주고 싶어요. 너무 부족한 것도 많았지만 그걸 알아낸 것도 너무 감사하고. 계속 시합을 나오고 팬들이랑 함께 경기하면서 올 한해 너무 잘 보낸 것 같아서. 저한테 2024년은 ‘만점의 해’가 아닌가 싶어요. 좋은 것만 생각하기에도 부족할 만큼, 아쉬운 건 있었지만 좋은 것만 다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일주일 쉬는 동안 개인을 위해 쓴 시간은?
▶지난주에도 발목 치료 때문에 거기 시간을 많이 내고 연습도 좀 하고. 개인적으로 한 게. (노트를 뒤적이더니) 히히. 운동 밖에 없었네요. 개인적으로 한 게 딱 한 번 친한 언니들과 밥 먹은 거, 그거 밖에 없어요. 고기 히히히. 고기 하고 맛있는 파스타를 먹었습니다.
-시즌 마치면 가장 하고 싶은 것은?
▶그냥 조용히 여행을 가고 싶어요. 멀리는 아니고 국내에서 제주도라든지 조용한 호텔에서, 조용히 혼자 시간을. 저는 책을 봐요. 그러면서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어요. 조용하게 차 마시면서. 좋은 풍경 보고.
-올해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아무래도 복귀하고 시즌 초반이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좀 주변에서 안 좋은 시선들도 있었고.
-그걸 느낄 수 있었나?
▶선수들 통해서 그리고 주변에 팬 분들 속에서도 저를 좀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분들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환경 속에서 경기를 해 나가는 게 조금 힘든 부분 이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마음에 상처를 받는 얘기를 직접 들은 적도 있나?
▶있었죠. 직접 저한테 얘기는 하지 않더라도. (누구를) 통해서 듣거나 이야기 하는 거를 제가 엿듣거나 하는 이런 상황들이 많이 있었어요. 공이 페어웨이를 벗어나서 찾고 있는 상황에서 같이 가서 봐야하는 것 아니냐 네 공 맞느냐 하는 얘기들을 듣고 했는데, (하지만) 그런 거는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왔기 때문에 모두 괜찮았어요.
-멘탈 트레이닝을 아직도 받고 있는지?
▶네 지속적으로 받고 있어요. 흔들리는 순간들이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다시 흔들리는 저를 안정적인, 제자리로 돌려주신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구체적인 내용을 소개하면?
▶주변 선수들과 같이 경기하면서 있었던 작은 이슈들. 그런 것도 있고 또 너무 많은 이슈들이 기사화가 되다 보니까 심리 교수님께서 좀 더 너에게 집중해서 너의 경기를 해라. 이렇게 복귀를 해서 뛰는 이 순간이 정말 올 초에 얘기했을 때 정말 선물 같은 일이라고 했던 것 잊지 말고 초심을 잃지 말고 그 감사한 마음 가지면서 경기를 해 나가면 될 것 같다. 이렇게 말씀해 주신 게 저를 제자리로 돌리는 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미국 진출에 대해서 팬클럽에서 조차 의견이 반반으로 갈린다고 알고 있는데.
▶사실 제가 올해 초에도 얘기했었잖아요. 좀 더 골프 발전을 위해 도움이 되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그 얘기를 했던 게 한국에서 뛰겠다고 얘기한 것은 아니었는데. 사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미국에 나가서 조금 잘 한다면 그게 조금 더 골프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이 아닐까. 왜냐하면 지금 선수들이 미국으로 많이 안 나가는 상황이고, 제가 나가서 좋은 성적을 내고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또 주니어 선수들이 조금 더 꿈을 가지고 열심히 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제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후배 선수들한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결정을 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심각하게 고민했었어요. 한 달 전 즈음에. 되게 복합적이었어요. 내년에 미국에 있어야 하나 한국에 있어야 하나. 한국에 있으려고 생각을 처음에는 많이 했다가, 제가 준비가 됐나 많이 고민을 했어요. 미국에 가서 워낙 안 좋았던 사례들도 있고.
하지만 나중에 어떻게 결론이 났나 하면. 내가 어떤 선택을 하고 싶은지 생각 했어요. 노트에 막 적어가면서 장점 단점 적어가면서. 그러다가 다 지우고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은 지를 생각해 봤어요. 그러니까 미국에 가서 제 골프를 성장 시키고 싶은 욕심이더라고요. 그래서 내년에 당장 못해도 되는 데 저는 미국에 가면 훨씬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금 믿고 있어서. 그러면 미국에 가자. 가서 열심히 해보고 잘 안되더라도 부딪쳐보고 그래도 그때 가서 안 되겠다 싶으면 다시 돌아오더라도 미국에 가자. 가서 부딪쳐 보자고 마음의 결정을 내린 거였어요.
-미국으로 가면 무엇이 가장 부족할 것 같은가?
▶전 어프로치인 거 같아요. 숏 게임. 왜냐하면 다양한 잔디에서 경기를 치르고. 미국이 지역마다 잔디가 다르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그걸 경험하면서 배우는 것도 있을 것 같아서. 그 부분을 잘 보완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여행 다니는 거는 힘들어 하지 않는 스타일인가?
▶네 좋아하고. 새로운 걸 도전하는 걸 좋아해요.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것은?
▶히히 좀 느린 편이에요. 저 좀 느린 편이라 내년에 가더라도 길게 1년은 적응 기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미국 음식은 좋아하는 편?
▶저는 너무 좋아요. 전 고기를 워낙 좋아하니까. 햄버거 샌드위치 같은 거 말고 스테이크를 좋아해요. 미국은 어디를 가더라도 스테이크가 잘 돼 있어서. 식사는 걱정 없어요.
-그럼 한국 음식 생각은 안 나겠네?
▶그래도 생각나지 않을까요? 김치찌개. 히히.
-좀 어려운 질문일 수도 있는데, ‘2024년의 윤이나’를 한 마디로 한다면?
▶음. 음. 음. (작은 목소리로) ‘복귀’ 아닐까요. 돌아왔다는.
-올해 가장 자주 느낀 하나의 감정이 있다면?
▶감정이요? (한참 있다가) 설렘. 되게 설레는 해였고 앞으로도 설레는 여정이 기다리고 있어서.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도 설레었고 앞으로도 설레고.
-복귀를 막 했을 때 윤이나와 시즌을 마친 상황에서 윤이나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조금 안정된 느낌. 초반에는 많이 들떠 있었고 경기에 집중을 못하는 요인들이 많았고 초반에는 골프보다는 골프에 집중 못하고 다른 거에 신경을 많이 썼던 것 같은데. 지금도 물론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 보다 골프만 생각하고 경기하고 있고 그 외적으로도 안정된 느낌이 들어서. 전과 달라진 점은 안정감인 것 같아요.
-눈물은 많은 편인가?
▶저 눈물이 많아졌어요. 원래 잘 안 울었는데. 올해 많이 울었어요. 무척 속상해서 운 적도 있었고 감동 받아서 운 적도 많았어요. 그런데 이게 같이 온 적이 굉장히 많았어요. 연장 가서 지고 나서 속상한 감정이 들 긴 했었거든요. 그 퍼팅이 돌고 나와서. 0.1초도 안 되는 순간에 심정이 막 요동쳤으니까. 그리고 막 끝나서 오는 데 팬들이 보이는 거예요. 그 분들이 저를 보고. 하이파이브를 이렇게, 쫙 서서 길을 만들어 주세요. 그럼 전 그 팬 분들이랑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가는 거예요. 그때 제가 막 울고 있으니까 팬들이 (같이) 막 울면서. 그때 너무 감동스럽고 이렇게 많이 와줬는데, 그렇게 좀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낸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 감동스러운 마음이 다 교차하더라고요.
-올해 가장 힘이 됐던 말이나 응원은?
▶팬들이었던 것 같아요. 팬들 존재 자체가 제게 너무 큰 힘이었고. 버텨줘서 고맙다고 팬들이 이야기 했어요. 제가 골프를 그만 둬야겠다고 마음도 먹었었고 그랬었는데 팬들 덕분에 다시 해야겠다고 그만두지 말아야지 마음을 먹었는데, 그 팬들이 버텨줘서 고맙다고 했을 때 많이 힘이 됐고. 우리는 믿는다고 그냥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프로님 행복하게 경기했으면 이렇게 얘기했을 때 많이 힘이 됐죠.
-올해 칭찬해주고 싶은 윤이나? 반성해야 될 윤이나?
▶칭찬이요? (머뭇거리더니) 제가 저에 대한 칭찬이 좀 박한 편이어서. 그래도 올해 시즌을 무사히 잘 보낸 거. 그 와중에 나름 좋은 성적으로 또 시즌 초반보다 끝이 더 성장한 제가 된 것 같아서 그 부분을 칭찬하고 싶고. 아쉬웠던 것은 아직도 주변에 흔들림이 좀 있는 거 같아서 조금 더 단단한 선수가 되고 싶은 마음이죠. 그게 좀 아쉬웠어요.
-MBTI에 대해서 좀 아는지?
▶네 알죠. 저는 ESTJ.
-설명을 좀 해준다면?
▶E는 외향적인 거요. S는 좀 직관형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반대 성향은 상상력이 좀 풍부하고, 제가 S 성향인데, S는 좀 현실적으로 다가가는 편이에요. 그냥 있는 그대로 보는 그런 거고. T는 조금 사고 형. 감정적인 것 보다 그냥 좀 감정적이지 않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느낌? 예를 들어서 그런 거 있잖아요. 나 슬퍼서 빵 샀어. 이렇게 얘기하면. F 성향을 가진 사람은 뭐 때문에 슬펐어? 하는데 T는 무슨 빵 샀어? 이런 걸 물어보는 그런 느낌. 그런데 저는 거기서 반반이 나오기는 해요. 49대 51 요런 식으로. 그래서 공감도 잘 하는 편이고 그래서 눈물도 많은 것 같고.
그리고 P랑 J가 있는데, 저는 J인데 조금 계획적인 편이에요. P는 좀 즉흥적인 느낌이고. 저는 계획을 많이 세우고. 그래서 ESTJ인데 F랑 반반 나오는.
-팬들에게 시즌을 마치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말 걱정이 많았던 한 해였는데 시작할 때. 팬들이 있어서 괜찮았고 걱정이 많이 없어졌고 그리고 팬 분들 덕분에 제가 그 힘든 순간에서도 버텨낼 수 있었고 기쁠 때는 같이 해서 두 배로 기뻤고. 마지막까지 왔을 때 보면 이젠 더 이상 팬과 선수의 관계가 아니고 이제는 어쩌면 가족과 같은 관계라고 생각이 들어요. 진짜 힘든 순간 같이 해줘서 너무 고맙고 내년에 제가 거처를 어디에 두고 있든지 제 마음은 변함이 없을 거고, 또 팬 분들께서 항상 응원해 주실 거라고 믿기 때문에 저는 내년에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그리고 조금 더 저를 믿어주시고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는 마음이 있습니다.
윤이나와의 대화는 여기까지다. 마지막에 그에게 모자에 사인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은 사인이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사인을 받은 게 10년 전 쯤 전인지 선수였다고 하면서 사인 받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괜히 파 3홀에서 사인을 받으면 꼭 미스 샷을 하게 되더라고 하면서. 그러자 윤이나가 빵 터진다.
아재 개그에도 웃어줄 수 있는 공감 능력이 뛰어난 그런 윤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