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개월차 의정갈등 속 '빅5' 쏠림은 완화… "의료개혁 마지막 기회"…

전공의 8.7%만 수련병원에 복귀
의료공백에 응급실 혼선 등 초래
필수의료 강화 필요성 더욱 커져
정부·의료계 소통 창구 다시 가동
내년 의대교육 문제 해소 등 과제


의료 개혁은 윤석열 정부의 4대 개혁 과제 가운데 가장 정치·사회적으로 첨예한 갈등이 발생했던 이슈다. 전 국민의 70% 이상이 의대 정원 증원을 찬성한다는 여론을 바탕으로 연 2000명씩 향후 5년간 1만 명을 증원한다는 계획을 밝히면서 전공의와 대한의사협회 등 의료계의 강한 반발로 이른바 의정 갈등이 10개월째 지속되고 있다. ‘빅5’ 등 이른바 서울 대형 상급병원과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근무하던 전공의 1만 3500여 명이 집단 사직하면서 응급실 전원과 진료 차질 등 각종 의료 공백을 초래했고 전 국민적 불편도 가중됐다. 의료 공백이 장기화되면서 의대 정원 증원을 밀어붙인 정부에 대한 불만도 동시에 커졌다.


정부가 의대 정원 증원과 함께 추진하는 지방·필수의료 개혁 패키지도 아직 제대로 힘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정부와 의료계 안팎에서는 필수의료 강화를 위한 건강보험 수가 현실화와 전공의 처우 개선,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 등의 의료 개혁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필수과제라며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다만 의정 갈등 과정에서 집단 사직한 채 아직 현장으로 돌아오지 않은 8500여 명의 전공의들을 어떻게 현장으로 복귀시키고 의대 정원 증원과 의대생 휴학 등에 따른 내년도 의대 교육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가 눈앞의 핵심 과제다.


13일 정부와 의료계 등의 설명을 종합하면 2월 20일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가 대정부 7대 요구사항을 내고 집단 사직한 후 현재까지 수련병원에 돌아온 비율은 8.7%에 불과하다. 사태 이전 전공의 1만 3531명 중 불과 1176명만 현장에 남아 있는 것으로 서울 시내 빅5 상급병원으로 한정해도 전체의 8.6%만 복귀했다. 현장을 떠난 전공의들 중 일반의 자격으로 개원하거나 의료기관에 재취업한 전공의는 지난달 20일 기준 4111명이다. 아직도 의료 현장에서 활동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전공의들이 8244명이나 되는 셈이다.


전공의가 떠난 상황은 고스란히 의료 공백으로 돌아왔다. 응급실에 의사가 부족해지면서 응급환자가 병원에 이송되지 못하는 ‘응급실 뺑뺑이’ 현상이 나타났다. 전국 응급의료센터에서 가동 중인 병상은 5940개로 사태 이전인 2월 1일에 비해 2.1% 줄었다. 중증·응급환자들이 몰리는 권역응급의료센터는 같은 기간 8.3% 줄었다. 이성우 고려대안암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최근 대한의사협회 종합학술대회 주제강연에서 “올 2월부터 응급실 환자 수가 평년 대비 60% 줄었다”고 전했다.


대형 병원들은 전공의가 현장을 떠나고 진료량이 격감하면서 큰 폭의 적자를 냈다. 서울대병원은 당기순손실이 1627억 원에 달하고 서울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도 각각 216억 원, 160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진료 여력이 없어 신규 환자를 받지도 못했다. 전진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빅5 대형병원의 올 2~6월 초진 진료 건수는 전년 동기 대비 32.7%나 줄었다.


하지만 의료 공백 장기화는 역설적으로 의료 개혁의 기회가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빅5 쏠림 현상이 완화되고 상급종합병원이 아닌 다른 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는 국민들이 늘어났다. 또 의료 개혁이 왜 필요한지 의료 공백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보건복지부의 한 관계자는 “의료 공백으로 병원들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논의가 가능해진 면이 있다”며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이나 비급여·실손보험 개편 등 과제들은 과거라면 논의도 어려웠을 의제”라고 밝혔다.


정부는 의료개혁특별의원회를 통해 지역·필수의료 개혁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의료개혁특위에서 논의 중인 과제들 가운데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 중증·필수의료 수가 현실화, 전공의 수련 환경 개선, 비급여·실손보험 개편,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 등 굵직한 과제가 적지 않다.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은 3년간 총 10조 원을 투자해 상급종합병원의 중증환자 비중을 70%까지 높이고 일반 병상은 최대 15% 줄이는 대신 각종 수가를 현실화하는 사업이다. 전체 상급종합병원 47곳 중 현재까지 31곳이 참여하고 있다. 또 지역·필수의료 강화를 위해 중증 수술과 마취 등 3000여 개 분야 수가를 현실에 맞게 인상하고 응급 진료·대기 등 24시간 진료에 대한 건보 보상도 신설한다. 전공의 수련 환경 개선을 위해 주당 연속 근무시간을 최대 36시간으로 제한하는 사업도 추진 중이다.


의정 갈등으로 장기간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정부와 정치권, 의료계의 소통 창구도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달 11일 출범한 여야의정협의체에는 아직 야당과 전공의단체가 불참한 상태지만 일단 정치적으로 사태를 해소할 수 있는 협상 창구가 열렸다는 데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협의체는 연말 전까지 사직 전공의 복귀 등을 위한 의미 있는 성과를 도출하겠다는 계획이다. 윤석준 고려대 보건대학원장은 “큰 사회적 갈등이 생기면 정치가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간 이를 방관한 탓에 문제가 커졌다”며 “현재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인지 논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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