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미 투자 전체를 다시 원점에서 봐야 하는 매우 심각한 상황입니다.”
14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정권 인수팀이 전기차 보조금 세제 혜택 폐지를 추진한다는 보도가 나온 직후 워싱턴DC에 파견된 국내 대기업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같이 밝혔다. 미국 내 한국 기업들 사이에서는 트럼프 인수팀의 이번 움직임과 관련해 “기존에 확정된 세제 혜택을 역행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며 “트럼프가 조 바이든 정부의 모든 기후 정책을 완전히 뒤집을 가능성을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트럼프 측 동향과 관련해 조현동 주미 한국대사가 15일 워싱턴DC 내 주요 한국 기업 주재원들과 긴급 회의를 갖기로 하는 등 미국 현지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당선인 인수팀이 바이든 행정부에서 추진된 최대 7500달러 규모의 전기차 보조금 혜택 폐지를 추진하는 가운데 대미 투자에 나섰던 기업들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으로 관측된다. 트럼프 정부에서 전기차 보조금 혜택 등이 모두 사라질 경우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인 미국의 전기차 전환은 늦어질 수밖에 없고 한국을 비롯한 주요국 기업의 대미 투자 역시 혼란이 불가피하다. 한 외교 소식통은 “현대차의 조지아 전기차 공장 투자만 해도 이를 뒷받침할 배터리 사업 등과 관련 후속 투자가 줄지어 예정돼 있다”면서 “이들 사업의 존폐 여부가 매우 불확실해지는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트럼프 당선인은 선거 기간 여러 차례 바이든의 ‘전기차 의무화’ 정책을 폐지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전기차는 비싼 데다 주행거리는 짧으며 대부분 중국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 트럼프의 논리다. 그는 바이든 정부의 친환경 정책을 겨냥해선 ‘그린 뉴 스캠(사기)’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미국 최대 전기차 기업인 테슬라를 이끄는 일론 머스크 최고경영자(CEO)가 트럼프 측에 보조금 폐지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사실이다. 테슬라는 혜택이 사라져도 자신들은 생존할 수 있는 반면 경쟁사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머스크 CEO는 특히 현대·기아차 등 외국 전기차 업체들에 리스(임대) 옵션 등을 통해 세제 혜택이 돌아가는 것에 불만을 표출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파이낸셜타임스(FT)도 “테슬라는 전기차 판매로 수익을 올리고 있는 반면 경쟁사들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으로 최대 7500달러에 달하는 소비자 세액공제를 받아 손실을 줄이던 상황이었다”면서 “트럼프의 전기차 정책은 테슬라에는 엄청나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접근 방안에 대한 논의도 상당히 진전된 것으로 전해졌다. 트럼프 인수팀은 전기차 세액공제 폐지를 광범위한 세제 개혁 법안의 일부로 담으면 공화당 의원들의 지지를 받을 것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임기 초반 종료될 세금 감면을 연장하는 데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려면 전기차 세액공제를 폐지해 비용을 절약해야 한다는 것이 트럼프 측의 주장이다.
일각에서는 미국 정부의 전기차 보조금 혜택을 받기 위해 한국 등 외국 업체들이 공장을 지은 곳이 미시간·오하이오·조지아 등 ‘러스트벨트(rust belt·쇠락한 공업 지대)’ 지역이라 실제 혜택을 폐지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들 지역의 공화당 주지사와 상·하원 의원들은 트럼프 인수팀의 전기차 혜택 폐지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IRA에 담긴 청정에너지 정책의 일부는 폐지가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도 힘을 얻고 있다. IRA 자금은 공화당이 정부를 장악한 주를 포함해 각지에 이미 배분되기 시작했고 공화당 지역에서도 IRA 프로그램이 인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IRA 폐지가 미국 경제에도 상당한 타격을 안길 것이라는 분석이 나와 주목된다. 가디언이 존스홉킨스대의 보고서를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미국이 IRA를 폐지하면 경제적 손실 규모가 1300억 달러(약 183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500억 달러는 수출 감소로 발생하며 800억 달러는 투자 위축으로 인한 손실인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일자리 타격이 심각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존스홉킨스대에 따르면 IRA를 통해 미국 내 일자리 30만 개를 창출했으며 공화당 우세 지역에서 1500억 달러(약 211조 원)에 달하는 제조업 관련 투자를 유치한 것으로 분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