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조선 후기 호적을 돈 주고 살 만큼 신분제가 흔들리던 시기. 당대 최고의 줄타기 고수 이날치가 3cm 정도의 얇은 줄 위에 올라선다. 이날치는 기세등등하다. 줄에 올라섰을 때 만큼은 양반이든 평민이든 모두 그의 발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누가 정했나 염병할 신분, 누가 없앨까 염병할 신분”을 외치며 줄 위에서 묘기를 펼친다.
국립창극단의 신작 ‘이날치전’이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14일 개막했다. 이날치는 조선후기 8명창인 이경숙(1820~1892)의 별명이다. 날쌔게 줄을 잘 타서 이날치라고 불린 이경숙은 노비로 태어나 줄광대로 살았지만 귀동냥으로 소리를 익혀 명창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이날치전’은 이경숙의 삶에 허구를 가미해 전통극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국립창극단의 창작극이다.
공연은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날치 역은 이광복·김수인이 연기하지만, 줄타기는 국가무형유산 줄타기 이수자 남창동이 맡는다. 극이 시작되지마자 등장하는 남창동은 20여 분간 줄 위에서 달리기, 점프, 백덤블링 등 각종 묘기를 선보인다. 지난 14일 열린 공연에서 관객들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그의 줄타기 실력에 함성과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1부 중반부터 이날치는 소리를 잘 하면 신분 상승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소리광대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가 소리를 하려는 이유는 벼슬을 얻어 주인댁 딸 ‘유연’과 다시 만나기 위해서다. 이날치와 유연의 사랑 이야기는 윤석미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설정이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날치의 연애사를 흥미롭게 풀어가기 위해 카카오톡을 변형한 ‘달톡 메신저’라는 캐릭터를 선보인다. 두 사람이 달을 보며 서로를 향한 마음을 이야기할 때 달이 메신저가 되어 이를 전달하는 것. 전통 계승에 함몰될 수 있는 창극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가의 기발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야기 중심의 1부가 끝나면 2부에서는 소리의 향연이 펼쳐진다. 이날치전에는 32곡의 노래가 나오는데, 이 중 절반은 전통소리, 절반은 창작 소리다. 특히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 중 대중이 익숙한 유명하고 핵심적인 대목을 고루 녹여냈다. 아는 노래가 나올 때마다 관객들이 ‘얼쑤’를 외치는 것도 창극 공연에서만 할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이다.
이날치전에서 가장 놓치면 안 되는 장면은 ‘소리 배틀’이다. 극중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주도해 펼쳐지는 소리 대결은 한 사람이 일정한 대목까지 부르면 다른 사람이 이를 이어받아 부르는 방식으로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 미 더 머니’를 연상케 한다. 윤선미 작가는 “19세기 한양의 광통교에선 중인들이 소리광대 1명씩을 천거하고 구경꾼의 추임새와 박수로 승자를 가리는 소리판이 성행했다”며 “그 시절에도 이렇게 놀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공연은 21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