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법案’ 못내는 정부…“자본시장법 바꾸고 배임죄 없애야”

◆ 부처·기관 통일안 없이 '빈손'
어떤 법으로 추진할지도 못 정해
입조처도 우려…“명확성 논란”
이사 충실의무, 현행법으로 충분
정부, 문제 알지만 정치권 눈치만
적대적M&A 예방장치 함께 논의를


“상법 개정은 기존 법체계를 훼손하면서 법인제도 전반에 충격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두산의 합병·분할이 문제가 된다고 하면 관련 규정을 바꾸는 것은 괜찮지만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우면 안 된다.”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더불어민주당이 상법 개정을 당론으로 정하면서 법안 통과를 밀어붙이고 있다. 반면 정부안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상법으로 할지,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할지 기술적 문제만 남아 있다는 설명에도 기업들은 윤석열 대통령이 상법 개정 의지를 밝힌 뒤 1년 가까이 정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학계에서는 상법 개정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정작 정부는 정치권의 눈치를 보면서 한발 뒤로 빠져 있는 모양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주주와 이사는 계약 관계가 아니며 지금 회사법에 따라 주주총회에서 위임 받은 대로 충실 의무를 다하면 충분한 것”이라며 “연초에 윤 대통령이 상법 개정을 언급한 뒤 스텝이 꼬였다.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정부도 인지한 게 아니겠느냐”고 설명했다.


재계에 따르면 야당의 상법 개정안 중 대표적인 독소 조항으로 △이사의 충실 의무 확대 △집중 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 선출 확대 △독립이사 제도 도입 등이 꼽힌다. 재계는 현행 상법상 ‘회사’로 돼 있는 충실 의무 대상을 ‘주주’로 넓히면 기업의 장기 투자가 위축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주주들의 이해관계가 다양한 상황에서 이사회의 결정이 모든 주주를 만족시키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올 상반기 기준 매출 10대 상장사의 외국인 지분율은 46.8%로 1년 전(34.5%)보다 12.3%포인트 늘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지분율이 증가한 외국투자가들은 주로 재무적 투자자로 단기 이익을 추구하고 기업의 장기 성장에 대한 관심이 적다”며 “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대규모 정책적 투자나 경제 상황을 고려한 고용 창출 등에 대한 이사들의 의사 결정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집중 투표제와 감사위원 분리 선출 확대 조항은 해외 투기 자본에 국내 기업들의 경영권이 그대로 노출되는 위험을 안고 있다. 집중 투표제는 이사를 선임할 때 주식 1주당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이사를 3명 뽑을 때 1주를 가진 주주도 3표를 행사할 수 있고, 한 후보에 몰아줄 수 있다. 개정안은 자산 2조 원 이상인 상장사에 대해 집중 투표제를 의무화하고 정관으로 집중 투표를 배제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소액주주 의결권 강화라는 당초 취지와 달리 실제로는 제2~3대 주주에만 유리한 제도라는 평가가 나온다. 2006년 칼 아이칸의 KT&G 경영권 공격 때처럼 해지펀드들이 단기 수익을 노리기 위해 제도를 악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기업 사냥꾼'으로 불리는 칼 아이칸은 2006년 다른 헤지펀드와 연합해 KT&G의 집중 투표제를 악용해 거액의 시세차익을 얻고 떠났다. 연합뉴스

감사위원 분리 선출제도 마찬가지다. 개정안은 감사위원을 기존 이사와 분리해 뽑고 이때 대주주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하도록 했다. 대주주를 견제할 수 있는 감사위원을 뽑겠다는 취지와 달리 결국 행동력이 높고 해외투자가 결집에 유리한 행동주의 펀드에 의해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재계는 보고 있다.


실제 한국경제인협회가 집중 투표제와 감사위원 분리 선출 등이 의무화될 경우를 가정해 분석한 결과 지난해 말 기준 국내 10대 기업 중 4곳이 이사회의 절반을 외국 국적의 자산운용사·사모펀드·연기금 등 외국 자본에 내줄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0대 기업에서는 8곳, 100대 기업은 16곳이 이사회의 절반을 외국 자본이 장악할 우려가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전문가들은 상법 개정이 기존의 법체계를 흔들 정도의 사안인 만큼 정부안을 토대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최준선 성균관대 로스쿨 명예교수는 “충실 의무가 이번 상법 개정안의 핵심인데 이를 개정한다고 해서 직접적인 권리 의무가 생기지는 않는다”며 “일본도 기업 합병 시 소멸 회사의 주주는 정당한 보상을 받게 돼 있는데 한국도 자본시장법에 공정한 가격으로 합병 비율을 정하라고 하는 게 주주 보호 측면에서 더 낫다”고 지적했다.


이번 기회에 배임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조언도 있다. 또 해외 투기 자본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복수 의결권 주식과 신주 인수 선택권을 도입하고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막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조 교수는 “이사가 회사나 주주를 위해 선의로 한 경영 결정에 대해서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경영 판단 원칙’을 넣는 식으로 형법상 배임죄를 완화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민세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역시 “유상증자나 물적 분할 등 소액주주 권익을 침해하는 사건은 대기업보다 중소·중견기업에 더 흔하게 일어난다”며 “상법 개정안은 이들 기업의 경영진이 회사를 키우는 과정에서 맞닥뜨릴 문제에 대한 논의가 빠져 있다. 다양한 파급효과를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회입법조사처에서도 민주당이 당론으로 채택한 상법 개정안에 대한 우려를 쏟아냈다. 야당은 주주에 대한 책임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보호의 대상이 되는 ‘총주주 이익’ 개념이 모호해 혼란만 가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회입법조사처의 박동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문위원은 박균택 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상법 개정안에 대한 검토 보고서에서 “‘총주주의 이익’의 의미가 무엇인지 불분명하다”고 지적했다. 박 의원 안은 국회에 발의된 법안 중 민주당 당론과 가장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 전문위원은 “이사의 의무 위반 시 제기될 수 있는 손해배상책임 및 형사책임을 고려할 때 명확성의 원칙 위배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개별 경영 행위에 대한 주주별 이해관계가 다를 경우 혼란을 겪을 수 있다는 의미다.


권 교수는 민주당이 제시한 ‘총주주 이익’이 그간 논의되던 주주의 비례적 이익보다 한층 강화된 개념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권 교수는 “(비례적 이익이 아니라) 총주주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은 주주 1인이라도 불만을 가질 수 있는 결정을 금지한다는 의미”라며 “현실적으로 달성 불가능한 목표”라고 꼬집었다.


민주당 당론에 포함된 주주총회 집중 투표제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박 전문위원은 “집중투표제를 강제하는 것은 회사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하고 자본 다수결의원칙과 배치된다”며 “집중 투표제를 실시하면 이사회의 당파적 행동이 초래되고 경영에 관한 중요한 정보가 외부로 유출될 위험성도 증가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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