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글래디에이터 2’에서 신 스틸러는 마크리누스역의 덴젤 워싱턴이다. 노예로 전락한 루시우스를 검투사로 발탁한 마크리누스는 주연 아닌 조연이다. 실제 역사에서는 카라칼라 황제를 암살하고 황제에 즉위했지만, 영화 속 마크리누스는 허구의 인물이다. 검투사들을 거느린 권력욕에 불타는 무기상으로 로마 정치와 맞서는 악인이다. 루시우스 역으로 새로운 영웅상을 보여준 폴 메스칼처럼 목숨을 건 검투 액션이 있는 것도 아닌데도 덴젤 워싱턴이 지닌 존재감에 극적 재미가 배가된다.
덴젤 워싱턴은 리들리 스콧 감독과 ‘아메리칸 갱스터’(2007) 이후 다시 만난 소감을 묻자 “‘마크리누스’라는 제목이 아니고 ‘글래디에이터’라는 영화 출연이었기에 전혀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다”며 유머로 답했다. 좋은 대본보다 필름메이커가 중요했다는 그는 “거장 리들리의 부름이었다. 그가 전화로 이 역할을 제의했다. 솔직히 말해서 먼저 대본을 읽었는지, 리들리가 전화를 먼저 걸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쪽이든 내 대답은 ‘예스’였다”며 경의를 표했다.
마크리누스는 지긋이 바라보는 눈빛 하나로 비열한 욕망을 드러낸다. 덴젤 워싱턴은 “내가 맡은 배역(마크리누스)은 첫 2~3주 동안 관중석에 있었고, 아래에서 젊은이들이 서로 죽이려고 싸우는 것을 쳐다보았다. 많은 걸 듣고 지켜보기만 했다. 처음에는 왕실 입회인이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참관인이 아니었다”고 묘사했다. 루시우스를 이용해 더 큰 권력을 잡으려는 마크리누스를 두고 그는 “권력을 탐욕하는 인물이다. 복수와 통제는 권력의 부산물이다. 권력의 불가침성을 원하는 그를 보여주고 관객들이 알아서 나머지를 판단하길 원했다”고 묘사했다. 이어 폴 메스칼(루시우스)과 마르쿠스 아카시우스(페드로 파스칼), 루실라(코니 닐슨) 등 훌륭한 배우들이 왕실을 굳건히 했고 카라칼라 황제 역을 맡은 프레드 헤킨저(카라칼라 황제)의 연기가 좋았다고 언급했다.
그는 “영웅과 악인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를 하지 않는다. 인간이 원하는 것, 즉 욕망에 대한 탐구가 중요하다. 그들이 무엇을 겪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그들이 겪은 일을 되짚는다. 이 영화는 과거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대본에도 그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가 어떻게 착취당했는지, 학대당했는지를 알아내야 했다. 그게 배우가 할 일, 바로 ‘캐릭터 구축’이다”고 답했다. 이어 “캐릭터 구축을 위해 항상 앞서가려고 노력한다. 최근 2년 동안 80파운드 가량, 정확히 75파운드를 감령했다. 그리고 근육은 15~20파운드 정도 늘렸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어떻게 하면 최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했다. 가진 모든 것을 활용해 최고가 되는 것이 지금 나의 최대 관심사”라고 강조했다.
70세를 목전에 둔 ‘할리우드의 거성’ 덴젤 워싱턴에게는 정중하지만 직설적인 질문만 통한다. 실책만 찾아내는 성격 때문에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보지 않는다는 그에게 에둘러 묻는 완곡어법은 촌철살인의 답변만 돌아올 뿐이다. 지난 18일 베버리힐스 포시즌 호텔에서 열렸던 기자회견에서 그는 자신이 무대에 서는 브로드웨이 연극 이야기와 자녀들에 관한 물음에 긴 시간을 할애했다. 덴젤 워싱턴이 오델로역을, 제이크 질렌할이 이아고역으로 출연하는 셰익스피어 비극 ‘오델로’의 2025년 2월 프리뷰에 초대하기도 했다.
자녀들 모두 영화계에 종사하는 덴젤 워싱턴에게 배우와 감독이 된 두 아들에 관해 묻자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내가 영화광이라 아이들이 영화를 보고 자랐다. 맏아들 존 데이비드는 내가 무대에 서는 모습을 유독 좋아했고 무대에 서고 싶어했다. 아내와 저는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해보라고 했고 아내는 아이들이 존중과 절제를 먼저 갖추길 원했다. 예일대, 펜실베니아대, 모어하우스, 뉴욕대 티쉬 스쿨 등 모두 명문대를 다녔고 역사, 영어 등 전공은 달랐지만 자연스럽게 모두 이 업계에 뛰어들었다. 환경이 그랬다”고 답했다.
‘글래디에이터 2’는 검투사로 거듭난 아들 루시우스가 최고의 검투사였던 아버지 막시무스를 발견하는 과정을 그렸다. 루시우스의 어머니인 루실라 공주의 부친 마르쿠스 아우렐리루스 황제의 노예이자 검투사였던 마크리누스에게 눈이 가는 건 항상 최고의 가치를 보여주려는 덴젤 워싱턴의 값진 노력에서 나온다.
/하은선 골든글로브협회(GGA) 정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