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 없는 비밀의 숲…오감으로 느껴야 '진짜 정원'이죠" [이사람]

■이준규 에버랜드 식물콘텐츠그룹장
☞눈으로만 보면 그림
만져보고 향도 맡고…식물과 소통 중요
'훼손 우려' 내부반대 뚫고 울타리 없애
가꾸는 이·방문하는 이 한단계 더 성장
☞꽃이 없어도 예쁘다
식물 자체만으로도 충분 '혁신' 꽃피워
지자체 정원붐에 획일화…가치 아쉬워
겨울엔 '자작나무 숲' 치유감성 심을것

이준규 에버랜드 식물콘텐츠그룹장이 이달 15일 서울 종로구 서울경제신문 앞에서 정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성형주 기자

“눈으로만 보는 정원은 액자에 걸어놓은 그림과 다를 바 없죠. 정원 문화가 발전하려면 눈으로 보는 것 외에 손으로 만지고 코로 향을 맡는 등 ‘오감’을 활용해 볼 수 있게 조성해야 합니다.”


이준규 에버랜드 식물콘텐츠그룹장은 최근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정원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피력했다. 이 그룹장은 에버랜드의 ‘헤드 가드너(head gardener)’다. 헤드 가드너란 전문 정원관리사로 정원의 상태를 꿰뚫고 자신만의 철학 및 가치관에 따라 정원을 운영·관리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 그룹장은 2016년부터 에버랜드의 식물콘텐츠그룹장으로 근무하면서 포시즌스 가든, 장미원, 하늘정원길, 뮤직가든 등 에버랜드 내 모든 정원을 계절별로 연출하고 에버랜드 인근에 위치한 포레스트캠프, 은행나무 군락지 등을 가꾸고 있다.



이준규 에버랜드 식물콘텐츠그룹장이 이달 15일 서울 종로구 서울경제신문 앞에서 정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성형주 기자

인기 어트랙션인 티익스프레스나 루이바오·후이바오 등 판다로 유명한 에버랜드와 정원은 얼핏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뜯어보면 에버랜드의 정체성은 정원에 가깝다. 삼성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회장이 경기도 용인의 황무지를 사들여 나무를 심고 숲을 조성해 1976년 용인자연농원으로 문을 연 게 지금의 에버랜드다. 에버랜드가 50년 넘게 꼭꼭 숨겨왔다가 올가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한 ‘비밀의 은행나무 숲’도 이때 심은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면서 가능했다.


이 그룹장은 “(단순히) 예쁜 정원을 만들겠다고 하면 남부 지방이나 땅이 넓은 곳에 가서 일할 수도 있었다”면서 “에버랜드 정원은 식물로 시작된 문화유산을 가진 곳으로 트렌드에 따라 소비되는 정원이 아니라 성장하는 정원 문화를 만들어가기에 적합했다”고 설명했다. 대학에서 조경학을 공부한 그는 2002년 에버랜드 운영사인 삼성물산 리조트 부문에 신입 사원으로 입사해 조경 디자이너로 10년간 근무했다. 이후 퇴사해 영국 에식스대 위틀스쿨오브디자인에서 정원디자인 석사와 조경학 박사 학위를 받고 2016년 다시 에버랜드 식물콘텐츠그룹장으로 복귀했다.


헤드 가드너로서 정원에 대한 그의 철학이 담긴 대표적인 조치가 바로 울타리(펜스)를 없앤 것이다. 2017년 사람과 꽃 간에 울타리 없이 소통할 수 있어야 ‘진짜’ 정원이라는 생각에 그는 에버랜드 정원에 울타리를 모두 없앴다. 이 그룹장은 “관리하기 어렵다, 사람들이 들어가서 꽃을 밟을 것이다, 고객들이 가시에 찔려 불만이 들어올 것이다 등의 이유로 반대가 컸다”며 “울타리를 없애기로 한 날 아침까지도 진짜 없앨 거냐는 의견을 들었다”고 설명했다.


내부의 거센 반대에도 울타리 없애기를 강행한 것은 ‘아름다운 것을 일부러 밟을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실제로 울타리를 없앤 결과 사람에 의한 훼손이 줄면서 정원 관리 비용이 적게 들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저를 포함해 직원들도 성장했고 정원을 보는 사람들도 한 단계 더 성숙할 수 있었다”며 “정원은 식물과 정원을 만드는 사람, 그리고 정원을 방문하는 고객 모두 성장해야 진정한 정원이라고 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울타리를 없앤 것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꽃을 섞어 심는 조치 등이 에버랜드 정원에 적용됐다. 많은 지방자치단체가 드넓은 땅에 진달래나 철쭉 등 한 종류의 꽃을 펼쳐 보여줄 때 에버랜드의 장미 축제에서는 장미뿐만 아니라 라벤더·알리움 등 다양한 꽃을 함께 심었다. 새빨간 장미는 다른 식물들과 함께 있을 때 그 빨간색이 더 강하게 인식될 수 있다는 점을 겨냥했다. 이 그룹장은 “꽃이 없어도 식물 자체만으로도 예쁘고 충분하다는 생각에 포시즌스 가든에 배추·상추를 심었다”며 “먹거리를 가꾸는 데서 정원이 시작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가장 혁신적인 정원이라고 평가한다”고 했다.



이준규 에버랜드 식물콘텐츠그룹장이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에서 정원을 가꾸고 있다. 사진 제공=에버랜드

그는 에버랜드의 정원이 오감을 모두 자극하는 정원으로 고객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봤다. 오감의 필요성은 백리향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그룹장은 “백리향은 그냥 향기가 백 리까지 퍼져 나가는 게 아니라 내 발끝에 묻어서 백 리까지 따라간다는 의미”라며 “백리향처럼 꽃잎을 만지고 문질러줘야 향을 맡을 수 있는 꽃들이 있는데 눈으로만 보면 그 향을 맡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에버랜드가 꽃·분재를 소재로 핸드크림·향수 등을 개발하는 것도 모두 오감에 기반해 정원을 알리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똑같은 정원이라 하더라도 헤드 가드너가 있는 정원인지, 그의 철학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정원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그룹장은 “영국의 주요 정원인 ‘그레이트 딕스터(Great Dixter)’는 헤드 가드너인 크리스토퍼 로이드가 만들어 2대 헤드 가드너가 그의 가치를 계승해 지금까지 정원을 운영하고 있다”며 “국내는 문화재급 정원을 비롯해 주요 정원들이 가드너 대신 최저가로 입찰받은 관리 업체가 일괄적으로 관리하는 방식으로 운영돼 정원마다 다른 ‘맛’이 나오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이 같은 문제는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지난해 1000만 명에 달하는 방문객을 유치한 후 지자체에서 너 나 할 것 없이 정원 조성에 뛰어들고 있는 데서도 이어진다. 그는 “높은 품질의 정원을 조성해 방문객들이 제값을 내고 정원을 보도록 해야 하는데 한국의 정원들은 그렇지 못하다”며 “지자체가 넓은 면적을 내세운다면 에버랜드는 국내 최고 품질의 정원을 만들어 지자체의 꽃 축제와 비교할 수 없게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이준규 에버랜드 식물콘텐츠그룹장이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에서 정원을 가꾸고 있다. 사진 제공=에버랜드

현재 이 그룹장은 가을뿐만 아니라 겨울, 봄의 계절을 살고 있다. 식물을 심고 키워 꽃을 피우는 작업은 일 년 전부터 미리 준비해야 제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방문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올가을 국내 최대 규모인 은행나무 숲을 처음으로 일반에 시범 공개한 데 이어 겨울 축제에 선보일 자작나무 숲을 가꾸는 중이다. 내년 3월 개막할 튤립 축제를 위한 작업도 한창이다.


이 중에서 겨울 시즌에 선보일 자작나무는 에버랜드가 겨울에 처음 선보이는 콘셉트다. 그는 “자작나무는 하얗기 때문에 상처가 잘 보일 뿐만 아니라 덮인 수피를 벗겨내도 상처가 남아 있다”며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다른 사람에 의해 치유받는 얘기를 다룬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이 자작나무 숲을 배경으로 한 것도 이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자작나무가 사실 공해에 민감해 심기 어려운데 그런 감성을 잘 표현해보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물론 이 같은 작업들이 쉽지만은 않았다. 최근에는 이상기후로 꽃이 예상했던 날짜에 피지 않아 당혹스러운 상황들이 이어졌다. 이 그룹장은 “올해 매화 축제 때도 꽃이 안 펴 2주간 난감했다”면서 “아스타를 심어 추석 연휴 전에 공개하려고 했는데 더위가 이어지면서 이제야 꽃이 폈다”고 토로했다.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겨울은 오고 또 봄이 온다. 내년 에버랜드 정원의 키워드는 ‘발견하는 즐거움’이다. 이 그룹장은 “‘예쁘지? 봐’가 아니라 관심 있게 보면 더 재밌고 즐길 수 있다는 콘셉트”라며 “(그 재미가) 새로운 식물일 수도 있고 새로운 공간, 새로운 소품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궁금증을 자아내며 인터뷰를 맺었다.



he is…


△1974년 서울 △2000년 성균관대 조경학 학사 △2002년 성균관대 조경학 석사 △2002년 삼성물산 리조트 부문 입사 △2012년 영국 에식스대 정원디자인 석사 △2016년 영국 에식스대 조경학 박사 △2016년~ 에버랜드 식물콘텐츠그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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