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임금과 지속가능한 조달 [민창욱 변호사의 ESG 길라잡이]

민창욱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


생활임금(living wage)이란 근로자와 그 가족이 적절한 생활 수준을 누릴 수 있도록 지급되는 임금이다. ESG 모범기업인 파타고니아는 2025년까지 1차 공급업체 전체에 생활임금을 적용하겠다고 선언했다. 글로벌 인권경영평가지표(CHRB)는 기업이 자체 인력과 공급망에 대한 생활임금 지급 목표를 공개하도록 요구하고 있고, 유럽연합의 ‘기업지속가능성 실사지침’(CSDDD)은 실사의 항목에 적절한 생활임금의 보장을 포함했다. 이제 ESG 경영을 잘하는 기업이 되려면 소속 직원뿐만 아니라 공급망까지 생활임금을 지급하고 생활임금 미충족 여부를 정기적으로 실사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생활임금은 최저임금과 다르다. 최저임금은 국가가 법으로 정한 최저수준의 임금으로, 우리나라는 비혼 단신 근로자의 생계비와 유사 근로자의 임금수준 등을 기준으로 최저임금을 결정한다. 그런데 생활임금은 개별 근로자가 아니라 ‘근로자와 그 가족’이 기준이다. 즉, 생활임금은 근로자와 그 가족이 ‘적절한 생활수준’(decent standard of living)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비용을 토대로 산정된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앵커(Anker) 방법론에 따르면, 생활임금은 근로자와 그 가족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영양가 있는 식단, 건강한 주거, 교육과 의료, 기타 비상지출 등을 보장하기 위해 요구되는 금액을 조사하여 결정된다. 생활임금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최저임금보다 높은데, 예를 들어 2021년 기준 방글라데시의 법정 최저임금은 생활임금의 49% 수준이다.


국제사회가 생활임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생활임금의 미지급이 다른 인권의 침해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의 근로자들은 가구 소득의 대부분이 근로소득이다. 개별 근로자가 지급받는 근로소득으로 가족을 부양하기 어렵다면, 그 근로자는 비자발적 연장근로 등 강제노동에 노출될 위험이 커진다. 부모가 생활임금을 받지 못하면 자녀들이 아동노동에 동원되거나 충분한 교육 기회를 제공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처럼 생활임금이 근로자와 그 가족들의 교육, 의료, 주거, 문화 등의 경제·사회적 권리 전반과 연계되어 있기에, 국제노동기구(ILO)는 올해 3월 생활임금 정책에 대한 합의문을 채택하여 생활임금의 산정 및 이행 원칙을 제시했다.


물론 기업이 공급업체 직원 가족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다만 일부 윤리적 동기에서 시작된 기업의 생활임금 정책은 비즈니스에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국은 생활임금 제공 기업을 인증하는 제도를 두고 있는데, 2016년 약 2800개 인증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수조사에서 참여 기업의 절반 이상이 생활임금 도입 후 근로자 퇴사율이 감소했다고 응답했다. 직원과의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었다는 답변은 55%, 기업의 전반적 평판이 높아졌다는 답변은 78%였다. 페이팔(PayPal)은 2019년 저임금 근로자의 순 가처분소득(NDI)을 4%에서 16%로 높이는 정책을 시행했는데 기업의 수익성이 28% 증가했다고 밝혔다. 생활임금의 도입 자체만으로 이러한 경제적 효과가 발생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생활임금은 근로자의 장기근속을 유도하고 업무 만족도를 높이는데 일부 기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공급업체 직원에게 생활임금이 보장된다면 기업이 지속가능한 조달을 받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기업은 생활임금 정책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우선 국내외 사업장에 소속된 근로자들이 지급받는 임금이 생활임금 기준을 충족하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근로자들이 실제 수령하는 임금 중에는 국제기준상 생활임금에 포함되는 항목과 그렇지 않는 항목이 존재하는데, 회사의 현행 급여체계와 생활임금 사이의 격차(gap)를 분석해 생활임금 충족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생활임금은 지역별 생활수준 등에 따라 달라지므로, 생활임금을 산정할 때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를 활용하고 노사협의 절차 등을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아가 회사의 생활임금 정책을 공급망으로 확대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특히 생활임금 리스크가 가장 취약한 지역과 업종의 공급업체를 식별하여, 그 업체의 직원들이 생활임금을 지급받을 수 있도록 회사의 구매 정책과 관행을 개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국내 기업에서 생활임금 논의는 초기 단계에 있다. 생활임금을 산정하고 적용하는 데 실무상 어려움도 적지 않다. 다만 앞으로 좀 더 많은 기업들이 생활임금 정책을 발표하고, 소비자와 시장이 생활임금 지급 기업에 대한 인식을 제고할 수 있다면, 공급망에서 더 많은 직원과 가족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생활임금에 관한 우리 기업의 정책과 실무가 조금씩 발전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