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이 올해 말 끝나는 국가전략기술 설비투자 세액공제의 일몰 기한을 정부안보다 긴 5년 연장으로 합의했지만 정국 경색에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전문가들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폭주로 시작된 갈등이 내년도 예산안뿐만 아니라 세제개편안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아 최악의 경우 기업들의 경쟁력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3일 서울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여야 의원들은 국가전략기술 설비투자에 대한 통합 투자세액 공제 일몰 기한을 당초 올해 말에서 2029년 말까지 연장하는 데 뜻을 같이했다. 세액공제율은 반도체 기술에 한해 5%포인트 올리기로 했다. 연구개발(R&D) 비용 역시 반도체는 7년(2031년까지), 반도체를 제외한 국가전략기술은 5년(2029년까지) 더 세액공제 혜택을 제공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국가전략기술에는 반도체 외에도 △2차전지 △디스플레이 △수소 △바이오 등이 포함돼 있다.
당초 정부가 발표한 세법개정안에는 국가전략기술 설비투자 통합 투자세액공제와 R&D 비용 세액공제 일몰 기한을 3년씩 연장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업계와 전문가를 중심으로 공제 기한이 지나치게 짧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반도체와 같은 첨단 기술의 경우 투자 계획을 수립하고 성과가 나는 데 십 수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박수영 국민의힘, 김태년 민주당 의원 등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일몰 기한을 10년 연장하자는 내용의 법안을 낸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반도체 기술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는 선진국들은 보조금과 투자세액공제와 같은 지원을 상당기간 제공하고 있다. 유럽 연합(EU)은 2030년까지 역내 반도체 기업에 약 430억 유로(약 64조 원) 규모의 생산시설 보조금을 지급할 계획이다. 대만은 5%의 설비 투자 세액 공제와 25%의 R&D 비용 세액 공제를 2029년까지 제공할 예정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기재위 조세소위원회 논의 내내 일몰 기한 추가 연장에 난색을 표하던 기획재정부도 막판에 한 발 물러서 업계와 정치권의 요구를 어느정도 수용하기로 했다.
문제는 일몰 기한을 한 달 남기고 가까스로 합의에 성공했음에도 법안이 소관 상임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초 기재위는 29일 조세소위와 전체회의를 잇따라 열고 합의된 세법을 처리할 예정이었으나 주식 배당소득 분리과세나 상속세 최고세율 인하와 같은 다른 세법개정안에 대해 여야가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서 파행했다.
여기에 야당이 일방적으로 예산안을 처리하면서 상황이 꼬였다. 세법은 예산 부수 법안이어서 예산안이 본회의에 부의되면 함께 넘어간다. 5년 연장이라는 합의가 반영되지 않은 채 기존의 정부안과 의원 발의안이 본회의에 부의된 것이다. 여야 협상에 따라 당초 합의(5년 연장)대로 진행될 수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상황을 예측하기가 어렵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부족한 수준이나마 여야정이 의견을 모았는데 야당의 독주로 아무것도 확정하지 못했다”며 “국가 경제의 미래가 걸린 일마저 정쟁의 도구가 돼버린 상황이 씁쓸하다”고 지적했다.
업계는 하루라도 빨리 불확실성을 제거해달라는 입장이다. 기업들이 내년도 사업 계획을 짜야 할 시간이 이미 지났는데 당장 내년의 세액공제 여부도 알 수 없는 형편이어서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한 달 뒤의 상황도 모르는데 중장기 전략을 어떻게 구상하느냐”며 “일몰이 도래하기 전에만 법안이 의결되면 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고 비판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도 “여야가 이견이 없는 내용인데도 처리가 늦어지니 답답할 뿐”이라며 “충분한 내용이 아니어도 좋으니 하루빨리 결론이 나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