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상승률이 2%로 낮아지면서 정부가 가격 개입을 자제하기 시작한 8월부터 최근 4개월간 값이 오른 식료품과 음식 품목이 최소 500개를 웃돌았다. 올 들어 7월까지 인플레이션을 낮추기 위해 정부가 1주일에 2.5회꼴로 기업을 압박했는데 결국 더 많은 가격 인상만 불러온 셈이다.
3일 서울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 식품·외식 업계는 8월부터 11월까지 총 41차례, 501가지 상품에 대해 최대 20~33% 안팎의 가격 인상을 단행했다. 햄버거·커피 등 외식 상품 261개, 과자·우유 등 식료품 240개의 가격이 뛰었다.
주목되는 점은 이들 제품의 상당 수가 정부가 최근까지 가격 안정을 당부했던 제품들이라는 점이다. 정부가 지난해 11월부터 무려 세 차례나 가격 인하를 요구했던 오리온의 과자류가 대표적이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3%에 달했던 지난해 11월 농림축산식품부는 오리온 본사에서 현장 간담회를 열고 가격 안정을 당부했다. 정부의 요청에 오리온은 “2024년 가격 인상 계획은 없다”고 답했다. 물가 상승률이 떨어지지 않자 정부는 올 3월에도 오리온 청주공장을 찾았다. “정부의 물가 안정 기조에 적극 협조해달라”는 한훈 당시 농식품부 차관의 말에 이승준 오리온 대표는 “올해 가격 인상 계획은 없다”고 재차 밝혔다. 송미령 농식품부 장관 역시 7월 말 식품업계 주요 최고경영자(CEO)와의 조찬 간담회에서 이 대표를 만나 협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오리온은 결국 자사 초콜릿 함유 제품 13종의 가격을 이달 1일부터 평균 10.6% 올렸다. 대표 초콜릿 과자인 ‘초코송이’ ‘비쵸비’ 가격 인상률은 20%에 달했다. 7월 말 조찬 간담회에 함께 자리했던 샘표식품 역시 10월부터 양조간장(500g) 가격을 11.3% 인상했다. 지난해 11월 농식품부가 찾아가 가격 안정을 요청한 국내 커피 업계 1위 동서식품도 현장 방문 약 1년 만인 지난달 15일 ‘맥심 커피믹스’ ‘카누’ 등의 제품 가격을 평균 8.9% 인상했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현장 방문, 간담회, 담합 조사 등 수십 차례에 걸친 정부의 전방위 압박에 눈치를 보던 식품기업들이 미뤄왔던 인상을 줄지어 단행하고 있는 셈이다.
전문가와 식품·외식업계 종사자들은 물가 상승률이 높았던 시기 정부의 노골적 가격 동결·인하 압박이 결국 식품·외식 업계의 가파른 인상을 부추겼다고 지적한다. 가격을 제때 올리지 못하면 손실이 더 커지고 나중에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인상 폭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의 가격 동결 압박이 느슨해지는 순간 기업은 지금까지 못 올려 손해를 본 것까지 만회할 수 있을 정도로 가격을 큰 폭으로 올리게 된다”고 지적했다. 외식업계의 한 관계자는 “환율, 원재료 값, 배달료, 인건비 상승 등 인상 요인이 계속 쌓여갔다”며 “더 이상 올리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수준”이라고 토로했다.
실제로 롯데리아와 스타벅스는 하반기 들어서만 두 차례 가격 인상을 단행했다. 롯데리아의 경우 송 장관이 6월 초 서울 중구 롯데리아 소공2호점을 방문해 “물가 안정에 적극 동참해 달라”고 요청한 지 두 달만에 버거류 등 68종의 가격을 평균 3.3% 인상했고 9월 말부터는 매장·배달 이중가격제를 도입해 배달 가격을 최대 1300원 올렸다. 스타벅스는 8월 초 사이즈 업그레이드, 옵션 추가금을 300~800원씩, ‘스타벅스 홀빈’ 11종 가격을 20% 인상한 데 이어 11월에는 ‘자바 칩 프라푸치노’를 비롯한 아이스 음료 11종의 톨 사이즈 가격을 200원씩 올렸다. ‘토피 넛 라떼’ ‘딸기 라떼’ 등 겨울 음료 3종, ‘가나슈 레이어 케이크’ 가격도 기습 인상했다.
별도 공지 없이 가격을 올린 업체들이 있고 자장면·칼국수 등의 가격도 오르고 있음을 고려하면 하반기 들어 가격이 인상된 음식료품 및 외식 상품 수는 서울경제신문이 8~11월 넉 달 동안 집계한 501개를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서울 지역 자장면 평균 가격은 9월에 한 그릇당 7308원에서 10월 7385원으로 1.05% 올랐다. 칼국수 가격도 같은 기간 0.82% 상승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과 체감물가 간 괴리도 커지고 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9~11월 석 달 연속 1%대를 기록하며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반면 시장에서는 끊임없이 가격 인상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원재료·환율·인건비 등 비용이 상승해 값이 오르게 되는 비용 상승형 인플레이션의 경우 정부가 가격을 지도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값이 인상될 수밖에 없다”며 “정부의 개입이 인상 속도를 늦추는 효과를 기대해볼 수는 있겠지만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