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하루]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최호근 고려대 사학과 교수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미군 기지가 일본의 기습을 받았다. 이 공격으로 12척의 미 해군 함선이 침몰하거나 큰 피해를 입었고 188대의 비행기가 격추되거나 운행 불능 상태에 빠졌다. 2000명 이상의 군인과 68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에 비해 일본군 희생자는 64명에 불과했다. 전투 자체는 일본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4년 후 전쟁은 일본의 참혹한 패배로 끝났다.


일본인들에게 1945년 8월 15일은 엄청나게 파괴된 기반 위에서 새 출발을 모색해야 하는 ‘0시’의 순간이었다. 이 국가적 리부팅은 사실상 8월 6일과 9일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시작됐다. 과거를 정지 화면처럼 끊어보면 진주만과 히로시마는 별개의 비극이었다. 하지만 인과의 사슬 면에서 보면 히로시마는 진주만의 결과였다. 진주만이 없었다면 히로시마도 없었다. 아마 나가사키도 없었을 것이다. 인상적 화면이 아닌 동영상으로 재생하면 히로시마의 비극은 1941년을 지나 1937년, 1931년, 1910년까지 소급된다. 1905년과 1904년까지 가야할지도 모른다. 1937년은 중일전쟁, 1931년은 만주사변, 1910년은 한일합방, 1904년은 을사늑약이 일어난 해다. 1904년은? 독도의 소유권이 일본으로 바뀐 해다. 역사를 거대한 강의 형성과 흐름에 비유할 수 있다면 역사 공부는 이 강의 흐름을 거슬러 시원의 순간들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진주만 기습이 히로시마의 비극을 야기한 원류라면 일본의 조선 침략과 식민 지배도 그 원류의 일부였다. 한일 과거사와 관련해 최근 일본이 보여준 태도는 일본의 입장에서 외교적 개가로 보일지 모른다. 사도광산 사례에서 우리 정부가 보여준 아마추어 외교와 대조할 때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동북아시아 전체의 민심을 저버린 이 내향적 승리는 진주만 기습처럼 한 부분에 국한된 한 순간의 쾌거로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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