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축예산안을 둘러싼 프랑스 정부와 의회의 갈등이 끝내 ‘내각 총사퇴’라는 파국으로 이어졌다. 의회의 반대로 프랑스 내각이 해산된 것은 1962년 샤를 드골 대통령 당시 조르주 퐁피두 정부 이후 62년 만이다. 내년도 예산안 처리가 불투명해진 것은 물론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입지마저 흔들리면서 프랑스 정국이 혼돈에 빠져드는 양상이다.
주요 외신에 따르면 프랑스 하원은 4일(현지 시간) 원내 1야당이자 좌파 연합 정당인 신민중전선(NFP)이 발의한 미셸 바르니에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표결에 부쳐 찬성 331표로 통과시켰다. 과반을 이루는 정족수가 288석이었던 점을 볼 때 바르니에 내각 퇴진에 힘이 실린 셈이다. 발단은 프랑스의 만성적인 재정적자였다. 올 9월 취임한 바르니에 총리는 한 달 뒤 과감한 증세와 긴축을 내용으로 하는 내년도 예산안을 내놓았다. 재정적자가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의 5.5%로 늘어난 데 이어 올해 6.1%까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자 바르니에는 법인세를 올리고 상위 0.3%의 초고소득자에 대해 한시적으로 추가 과세하는 예산안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193억 유로(약 28조 4000억 원)의 세수를 더 확보하고 413억 유로(약 60조 8000억 원)의 공공지출을 삭감해 재정적자를 유럽연합(EU) 기준치인 GDP의 3% 이하로 낮추겠다는 계획이었다. 대대적인 지출 감축과 증세를 골자로 한 내년도 긴축예산안 처리를 위해 ‘의회 패싱’이라는 강수를 뒀지만 이는 결국 자신이 퇴진하게 되는 자충수가 됐다.
마크롱 정부는 단일 정당으로 의석수가 가장 많은 극우 국민연합(RN)과 정치적 대척점에 있는 좌파 연합이 분열해 표가 분산될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좌우의 거센 협공 속에서 바르니에 내각은 출범 3개월도 안 돼 맥없이 무너졌다. 바르니에 총리는 불신임안이 통과되자 마크롱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르니에 총리는 프랑스 5공화국 역사상 최단명 총리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프랑스가 정부 공백 상태에 빠지면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내년도 예산안 처리다. 마크롱 대통령이 신속히 후임 총리를 임명하고 새 정부를 꾸려 새로운 예산안을 제출해야 하지만 시한이 촉박하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대통령이 바르니에 정부의 운명을 직감하고 일찌감치 후임 총리 물색에 나선 만큼 조만간 새 총리 임명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당장은 내년도 예산에 비상이 걸렸다. 올해 예산을 내년까지 연장하는 방식도 고려되지만 이 경우 바르니에 정부의 증세 계획 등이 모두 빠져 프랑스 재정적자가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 모건스탠리는 올해 예산을 그대로 가져간다고 가정할 때 프랑스의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6.1%에서 6.3%로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내년까지 예산안이 처리도, 연장도 안 되는 것이다. 이 경우 공무원 급여 등을 지급하지 못해 공공행정이 마비되는 등의 ‘셧다운’에 빠질 수도 있다. 이번 내각 총사퇴로 마크롱 대통령의 입지가 위태로워진 것도 프랑스를 혼란스럽게 하는 변수다. 임기가 2년 이상 남은 마크롱 대통령은 “(내각이 무너져도) 마지막 1초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