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사태와 탄핵을 둘러싸고 정치권이 극심한 분열 양상을 보이면서 현 정부의 각종 경제정책들이 표류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시급히 처리돼야 할 반도체특별법과 상속세제 개편안 같은 주요 경제 법안이 좌초될 위기에 처했고 밸류업과 양극화 해소 정책도 무산될 가능성이 커졌다. 전문가들은 비상계엄 선포 과정의 불법은 철저히 따져 묻되 경제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는 자세로 예산과 경제 법안부터 처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8일 서울경제신문이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을 분석한 결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와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국토교통위원회·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정무위원회에 계류된 경제 법안은 총 1764건으로 집계됐다. 정무위에서 발의한 국가보훈부·국민권익위원회 관련 법안과 과방위의 방송 및 통신 관련 일부 법안은 제외한 수치다.
정부 안팎에서는 최근의 비상계엄 사태와 대통령 탄핵 정국으로 각종 경제 관련 법안 처리가 줄줄이 밀릴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강화 및 혁신 성장을 위한 특별법(반도체특별법)이 대표적이다. 반도체특별법에는 보조금 지급 근거 명시와 반도체 지원 기구 구성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여야 모두 반도체특별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야당에서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조항)’에 반대하고 있어 국회에서 경제 현안 관련 논의가 재개된다고 해도 정치 이슈에 묻힐 가능성이 지배적이다.
전력·에너지 부문에서도 입법 과제가 산적해 있다.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이 그 예다. 평균 4~5년이 걸리는 입지 선정 기간을 송전설비 입지 결정 기한을 2년으로 제한하는 것이 골자다. 에너지 업계에서는 송전망 설치 속도가 전력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 관련 법률 처리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돼왔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시설 설치 근거를 담은 고준위특별법도 조속히 처리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지금 우리 경제는 중국의 추격으로 전기차는 물론 반도체까지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며 “신산업 육성에는 여야 없이 협업해서 첨단산업 지원 관련 입법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세법 중에도 개정이 시급한 사안이 많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실제로 상속세 최고세율을 50%에서 40%로 낮추고 20%의 최대주주 할증평가를 없애는 상속·증여세법 개정안은 야당 반대가 강해 좌초될 가능성이 높다는 해석이 나온다. 반도체 기업의 통합투자세액 공제율을 현행보다 5%포인트 높이고 국가전략기술 투자세액공제 대상에 연구개발(R&D) 시설 투자를 포함하는 정부 지원책도 뒤로 밀릴 공산이 커졌다. 배당 증가분을 저율 분리과세하고 주주환원 증가액만큼 법인세에 5% 세액공제를 제공하는 밸류업 세제도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증시 불안을 감안하면 금융투자소득세 폐지도 시급하다는 지적이 많다.
학계에서는 대통령 탄핵과는 별개로 경제 분야에서는 야당이 수권 정당으로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요청이 나온다. 한국국제경제학회장인 원용걸 서울시립대 총장은 “대통령은 당과 정부에 위임하겠다고 했는데 국민의힘 의석수는 100석 남짓”이라며 “야당의 협조는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시스템반도체와 인공지능(AI), 양자 등 미래 먹거리 산업은 정치의 문제가 아닌 만큼 초당적 협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여야가 협치를 통해 예산안이라도 먼저 통과시켜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내란을 공모한 반헌법적 정부와 합의할 수는 없다”며 대통령 탄핵 없이는 예산 협의도 없으며 기존의 감액안을 통과시키겠다는 입장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한 발 더 나갔다. 그는 10일 본회의에서 예산안을 처리하겠다면서도 추가 삭감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대규모 증액을 해도 모자랄 판에 추가 감액을 시사한 것이다. 정부 안팎에서 추가경정예산 조기 편성 얘기가 나오는 상황에서 야당의 기조는 경제를 크게 위축시킬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김종웅 한국재정학회장은 “정부가 절대 감액하면 안 된다고 보는 사안을 정의하고 국회와 협의해 조정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예산안 부수 법안인 세법 개정안에 대한 논의도 속도를 내야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