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정국 여파로 원·달러 환율이 급등(원화 가치 하락)하면서 우리 기업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특히 외화부채가 많아 환율 상승 리스크가 큰 기업들 중심으로 재무건전성에 충격이 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0일 재계와 한국은행 등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비금융기업(기업)의 대외 채무는 1662억 1200만 달러(약 232조 원)에 이른다.
재계에서는 조 단위 해외투자가 많았던 배터리 업계와 항공기 리스 등에 달러를 써야 하는 항공 업계를 중심으로 올해도 외화부채가 상당히 증가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LG에너지솔루션의 3분기 기준 외화부채는 9조 5987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항공의 외화 차입금도 14조 6986억 원에 이른다. 2020년 인텔 낸드사업부 매입(90억 달러)에 뭉칫돈을 쓴 SK하이닉스는 올 들어 그룹 차원의 ‘리밸런싱’ 작업을 통해 차입금을 수조 원가량 줄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외화부채가 25조 998억 원에 이른다. SK그룹은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사태 발생 이튿날인 4일 최창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주재로 사장단 긴급 회의를 소집해 환율 급등이 회사 재무에 미치는 영향을 점검하기도 했다. SK는 SK하이닉스를 비롯해 SK이노베이션·SK온 등이 상당한 외화부채를 보유하고 있어 환율 상승에 가장 민감한 기업 중 하나로 분류된다.
국내 기업들은 고환율이 장기화될 경우 재무 건전성은 물론 실적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단기적으로 선물환 계약 등 외환 헤지 방파제를 통해 충격에 버틸 수 있지만 사태가 길어지면 손실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원·달러 환율이 10% 뛸 경우 세전 이익이 2388억 원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그나마 올해는 무역수지가 흑자를 나타냈지만 내년부터 또다시 적자로 돌아서면 달러 가뭄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기업이 원자재를 사기 위해서는 달러가 필요한데 시장에서 달러를 사들이는 과정에서 달러 가치가 올라 환율이 오르기 때문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원·달러 환율이 1400원 선을 넘기는 것 자체가 이미 위기 상황”이라며 “외화 표시 부채에 대한 이자와 원금 상환 부담이 모두 늘면 정상적인 투자와 고용도 어려워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환율 상승이 수출기업에 유리하다는 상식도 점차 무너지고 있다. 과거에는 환율이 오르면 우리 제조 기업의 가격 경쟁력이 개선돼 수출이 늘어난다는 게 상식으로 통했지만 최근에는 글로벌 공급망 체계가 복잡해지고 있어 환율과 수출의 인과 관계가 약해졌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여기에 환율 상승이 글로벌 신인도 하락으로 이어져 각종 무역금융 등에서 손해를 볼 수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