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이 ‘망 분리 규제’를 일부 허물었지만 정작 금융사들은 규제 완화를 아직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규제 완화 기대감에 70곳이 넘는 금융사가 앞다퉈 특례를 신청했으나 두 달 동안 규제 허들을 넘은 곳은 10곳이 채 안 된다. 금융권에서는 생성형 인공지능(AI)과 같은 첨단기술을 빠르게 접목할 수 있도록 ‘네거티브 규제’ 등을 통해 심사 문턱을 대폭 낮춰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0일 금융권에 따르면 올 9월 금융위원회의 망 분리 규제 관련 혁신금융 서비스(규제 샌드박스) 신청은 141개에 달했지만 9일 금융위가 지정한 혁신금융 서비스는 불과 10건에 그쳤다. 금융사만 떼어놓고 보면 74곳이 신청서를 냈지만 통과된 곳은 9곳뿐이다. 업계가 신청한 혁신금융 서비스는 대부분 생성형 AI를 활용한 업무인 것으로 전해졌다. 금융 업무나 서비스에 AI를 활용하려는 금융사들의 수요는 넘쳐나고 있지만 당국의 규제 완화 속도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망 분리 규제는 개인정보가 담겨 있는 금융사의 내부망 서버를 외부 인터넷과 분리하도록 한 규제다. 해킹으로 인한 대형 금융 사고가 발생하지 않게 내·외부망 간 연결 자체를 차단한 것이다. 하지만 급변하는 정보기술(IT) 환경에서 금융권의 경쟁력을 저하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금융 당국은 올 8월 ‘망 분리 개선 로드맵’을 내놓고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규제를 일부 완화하기로 했다. 특히 금융권에서는 생성형 AI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한 점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당국의 규제 완화에도 좀처럼 성과가 나지 않는 것은 당국 내 인력 부족 등으로 특례를 심의하는 데만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탓이 크다. 금융감독원과 금융보안원 등이 특례를 신청한 업체를 한 곳 한 곳 직접 찾아가 규제를 낮춰도 보안 문제가 없는지를 점검해야 하다 보니 업계의 기대만큼 속도가 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당국 관계자는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규정에 대한 예외를 둘 때 별도의 보안 요건을 둬야 하고 업체가 이 요건을 충족했는지도 점검해야 한다”면서 “업무 소관이 다른 직원들까지 투입하고 있지만 다소 시간이 걸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성엽 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전 세계적으로 AI 기술을 금융권에 접목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면서 “규제 샌드박스 심사가 좀 더 빠르게 이뤄질 수 있도록 충분한 인력이 보강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금융사들은 당국이 신규 서비스 허용 여부를 일일이 점검하는 현 체계로는 금융 혁신이 더딜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생성형 AI 같은 신기술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기도 쉽지 않은데 이를 적용한 서비스를 내놓을 때마다 당국의 검증 과정을 거치다 보면 실제 서비스 도입 시기는 더 늦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시중은행들이 AI 은행원 등 서비스를 속속 내놓고 있지만 AI 품질을 높이려면 오픈 AI 등 대규모언어모델(LLM) 용도가 더 높아져야 한다”며 “(금융사 내부망과) 외부 클라우드와의 접점이 더욱 확대돼야 하는데 그때마다 당국의 스크린을 거쳐야 해 난감한 부분이 있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최소한의 보안 요건만 어기지 않으면 서비스를 허용하는 식의 ‘네거티브 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서비스를 일단 시작하게 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사후에 이를 취소하는 식으로 금융권의 기술혁신을 장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신청 건수가 앞으로 더 늘어나면 공무원들이 하나하나 이를 살펴보는 데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다”면서 “금융 안정성 유지나 소비자 피해 방지 등 최소한의 기준만 만들어 놓고 이에 저촉되지 않으면 서비스를 할 수 있도록 풀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